“케냐에선 사자와 사냐고요?”… 아프리카서 온 두 유학생 서울살이

입력 2010-02-04 18:01


“케냐? 미국이잖아.”

“아니야. 인도네시아에 있을 걸.”

“미국에 있는 주(州) 이름이라니까.”

설전을 벌이는 한국인 사이에서 케냐 유학생 줄리어스 체루이요트 토웨트(28·S대 국제관계학과)씨는 난감해졌다. “케냐는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인데….” 그는 길 가다 낯선 행인 두 명에게 붙잡힌 참이었다. 인사도, 자기소개도 없었다. 그들은 저벅저벅 걸어와 다짜고짜 물었다. 어디서 왜 왔는지, 나이는 몇 살이고 결혼은 했는지, 애인은 없는지. 한국 생활 5년차. 토웨트씨에겐 이런 길거리 질문공세가 낯설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여의도 지하철5호선 여의나루역에서 국민일보 사옥까지 걷는 10여분. 그 짧은 시간에도 행인 10여명의 눈동자 20여개가 두 사람에게 박혔다. 토웨트씨와 역시 케냐 유학생 테레사 와이리무 둥구(26·A대 인터내셔널비지니스 석사 과정)씨였다. 뒤돌아보는 사람, 서서 쳐다보는 이, 아예 따라 걷는 사람.

명색이 글로벌 시대라는데, 서울 거리의 아프리카 흑인은 여전히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친절하거나 무지하거나

한국에 온 첫해인 2005년, 검은 피부의 토웨트씨에게는 시간 장소 불문하고 질문이 쏟아졌다.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말하면 상황은 악화됐다. 질문 양은 늘고, 내용은 황당해졌다.

어떤 이는 “사자랑 같이 사느냐” “길거리에 사자가 돌아다니느냐”고 물었다. 아프리카→초원→사자로 이어지는 연상 작용의 결과였다.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 얼굴이 더없이 진지했다. 식인종을 만나봤느냐, 비행기가 있느냐, 냉장고와 TV를 본 적이 있느냐, 수돗물은 나오느냐….

“나이로비(케냐 수도) 공항에서 여행객들이 아프리카에 가자며 항의한 적이 있었대요. 아프리카니까 기린 있는 그런 초원에 비행기가 착륙할 줄 알았나 봐요. 번듯한 공항 건물이 보이니 아프리카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한국 사람의 질문이 그런 수준이란 얘기다.

대학원생 둥구씨의 경험도 다르지 않았다. “아프리카에 대도시가 있다는 게 한국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에요.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공항도 있고 기차, 놀이동산도 있어요. 쇼핑몰에 가봤냐고 묻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에요.”

영어 차별도 흔하게 당했다. 영어는 케냐의 공식 언어. 가족끼린 스와힐리어나 부족언어를 사용하지만 학교에서는 영어를 쓰기 때문에 영어는 제2의 모국어다. 토웨트씨는 “영어에 서툰 유럽 백인은 영어강사로 쉽게 취직하는 반면, 아프리카인은 영어가 아무리 유창해도 기회 자체가 없다. 스펠링도 모르는 백인이 영어강사로 취직하는 걸 봤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온 흑인과도 비교됐다. 그는 “같은 흑인이라도 미국에서 왔다면 한국 사람의 태도가 달라진다. 미국인은 무조건 스마트하고 그들이 하는 말은 다 옳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백인 친구와 함께 서 있을 때는 아예 저를 쳐다보지도 않아요. 마치 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키 1m77, 몸무게 75㎏의 건장한 흑인 남성 토웨트씨는 지하철에서 옆 좌석 승객이 그를 피해 슬금슬금 도망가는 일도 종종 겪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어요. 이젠 옆 사람이 일어나면 따라 일어나요. 그리고는 마치 좌석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혀를 끌끌 차주고는 옆 객차로 가죠(웃음).”

물론 모든 한국인이 아프리카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둥구씨는 말했다. “모욕적인 언행을 하는 건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정말 친절해요. 동시에 아프리카에 대해 무지하고.” 그러고 보면 두 사람에게 한국인은 세 부류였다. 친절하거나, 무지하거나, 아니면 친절하면서 무지하거나.

한국이 소비해온 아프리카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아프리카는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땅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자연 다큐멘터리 배경이거나 외신 속 소년병과 학살의 공간, 혹은 부시맨과 피그미족이 존재하는 비문명의 과거.

최근에는 ‘굶주린 어린이’라는 아프리카의 새 이미지가 한국을 휩쓸고 있다. 60년 만에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도약한 한국에는 동정을 부르는 사연이 필요했다. 아프리카는 적절한 대상처럼 보였다. 아프리카 신생아를 위한 털모자 뜨기가 대성공하고,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같은 어린이 도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도와줘야 할 아프리카’의 이미지 역시 아프리카 전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프리카는 빈곤의 땅이다. 각국의 원조도 절실하다. 3000만㎢의 광활한 대륙에는 그 넓이만큼 거대한 편차가 존재한다. 토웨트씨는 그 격차를 이해하는 게 아프리카 이해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아프리카에는 53개의 개별 국가가 존재해요. 열대부터 사막, 초원, 극지방에 가까운 날씨까지 다양한 기후대에, 수많은 종교와 언어가 뒤섞여 있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부유한 사람도 존재해요. 근데 한쪽면만 보는 거죠. 게다가 한국 교과서의 아프리카 관련 통계는 몇 년 전 낡은 정보들이에요. 업데이트가 필요해요.”

아프리카의 미래 ‘블랙 미들 클래스’

한국이 아프리카의 비참함을 얘기하는 사이, 21세기 아프리카는 거대한 소비대륙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구 1500만명의 라고스(나이지리아)와 요하네스버그(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대도시는 매년 10%씩 고속성장하고 있다.

더불어 아프리카의 흑인 중산층(BMC·Black Middle Class)은 세계 경제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생계 걱정 없는 가정에서 보통교육을 받고, 대학 졸업 후 대도시에 취업한 젊은 엘리트 계층. 토웨트와 둥구씨의 묘사에 따르자면 ‘노키아 휴대전화를 들고 도요타 프리우스를 타며 도시에 집 한 채를 마련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21세기 아프리카의 새 소비파워로 급부상 중이다.

사업가 아버지의 8남1녀 중 여섯째인 토웨트씨와 공무원 부부의 2남2녀 중 막내딸인 둥구씨 역시 BMC에 해당한다. 토웨트씨는 한국 유학비용을 부모로부터 지원받는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해외 유학을 후원하는 것. 한국이 몰랐던 아프리카 부모의 모습이다. 한국에 오기 전 공무원으로 근무한 둥구씨는 국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고 있다.

두 사람은 고국에 돌아가면 케냐 사회의 중추로 활약하게 된다. 그들의 추억 속에 남은 한국은 대륙 아프리카가 쌓은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한국에서 인상 깊은 풍경을 꼽아보라니 눈이었다. 케냐의 한겨울에 해당하는 6∼7월 평균 기온은 17도. 10도까지 떨어지면 한파로 분류된다. 영하 기온이 없는 케냐 거리에서는 얼음도 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토웨트씨는 한국 체류 첫해, 눈 오던 풍경을 잊지 못한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천국에서 눈송이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사진 찍으면서 얼마나 흥분했던지…. 아마 옆에서 보던 한국 친구들은 다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