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의 이건 뭐야?] 소통과 불통 사이
입력 2010-02-04 18:13
‘개독’은 신조어가 아니다. 최근에 발명된 인터넷 용어도 아니다. 널리 쓰인 지 벌써 몇 년째로, 한국 기독교인을 모욕과 경멸을 담아 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앞에 ‘개’가 붙어 좋은 말이라고는 없지만, 이 단어는 앞뒤가 꽉 막히고 저희끼리만 통하는, 믿는 편과 안 믿는 편의 이분법으로만 세상을 보는 ‘소통 부재’의 기독교인들을 비난할 때 주로 쓰인다.
나는 목회자 아버지를 두었으면서도 그리 뜨거운 신앙이 있다고는 말 못할 어정쩡한 입장이다. 하나님 자리에 자신이 서 있는 사람들도 싫고, 마이크 들고 지하철 한가운데 서서 넌 지옥에 갈 거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도 싫기는 하다. 일단 소음 때문에 다른 승객들 보기 민망하고, 그 방식이 요즘 사람 마음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후져서’ 보기 안쓰럽다.
그렇지만 무조건 ‘기독’을 ‘개독’이라 취급하는 걸 볼 때도 억울하다. 희한한 것은, “기독은 개독”이라고 핏대 올리는 사람일수록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선의나 희생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곧 예수이기를 바라니 마음에 찰 리가 없다. 무전여행하다가 시골 교회 사택에 재워 달라는 청을 목사가 거절했다며, 무료로 숙식을 시켜 주지 않는다고 그토록 분노한다.
멀리 갈 것 없이, 교인이라고는 서너 명도 안 되는 초라한 우리 교회 지하 사택 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누가 두드려서 나가 보면 죄다 말없이 손부터 내민다. 애처롭게 순진한 아버지는 얼마간이라도 쥐어 주고, 아버지의 명성은 동네에 널리 퍼져 하루에도 몇 명씩 수금을 오기 시작했다. 한 명당 1000원씩, 하루에 열 명 스무 명 다녀가면 메뚜기 떼가 쓸고 간 이집트 꼴이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목사 가족은 굶어 죽게 생겼다. 결국 내가 악역을 맡았다. 아버지를 문 뒤로 밀어 넣고 딱 잘라 거절하자 대뜸 욕을 하기에 “아니, 내가 목사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이후로 나의 명성도 동네에 널리 퍼졌는지 돈을 요구하는 사람이 딱 끊겼다.
개독 논란은 예수 믿는 사람이 곧 예수이기를 바라는 지나친 기대와, 우리 편 아니면 악으로 간주하는 독한 교인들 사이의 충돌이다. 그런 독한 교인들은 이 땅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를 ‘내 탓이오’라고 외치면서, 자신이 지상에서 누리고 있는 나라가 하늘에서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수밖에. 내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고 더한 호의호식을 하늘나라에서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임하게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고, ‘개독’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다짐하지만 잘 안 된다. 슬프지만, 그게 인간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