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in&out] 안미정 “혹시, 저 기억나세요?”

입력 2010-02-04 18:04


TV 청소년드라마 주인공 → 여성 힙합그룹 멤버 → 뉴스 리포터… 그리고 영어강사

고등학생이 된 소녀는 교복을 맞추러 갔다. 치수를 재던 교복가게 아줌마는 “참 예쁘네. 교복 모델 뽑는대, 한번 나가 봐”라고 했다. 1995년 송혜교가 대상을, 96년 고(故) 이은주가 은상을 타고 배우가 됐던 스마트 학생복 모델 선발대회의 97년 초청 가수는 인기그룹 ‘룰라’였다. 룰라를 보고 싶은 욕심에 참가신청서를 낸 소녀는 은상을 탔다. 부상은 MTM연기아카데미 수강증. 안미정(29)씨의 첫 도전은 배우였고, 이렇게 우연히 시작됐다.

주말마다 MTM에서 발성, 대사, 표정을 연습하다 KBS 청소년드라마 ‘어른들은 몰라요’에 발탁됐다. 고교생 주인공 3명 중 1명이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경기도 일산에서 서울 여의도 방송국으로 가야 했다. 상위권이던 성적은 갈수록 떨어졌다.

고교 1학년을 마칠 때쯤 열여섯 소녀는 자신의 도전을 ‘분석’해 봤다. 지금 잘하고 있는지,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건 사춘기를 지나며 생긴 습관이다. 예쁘단 말은 많이 듣지만 연기 잘한단 소리는 별로 듣지 못했다. 다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듬해 9월 어머니와 함께 볼 일이 있어 간 여의도. 길을 걷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가수 해보지 않을래요?” 남성그룹 ‘듀스’의 이현도가 소속된 연예기획사 관계자였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시작된 두 번째 도전은 가수다.

강한 비트와 격렬한 춤, 저항적 가사의 힙합이 뜨던 때였다. 기획사는 여성 4인조 힙합그룹 ‘O-24’(오투포라고 읽는다. 24시간 힙합을 한다는 뜻)를 꾸렸다. 동료 멤버 이가혜 김민지 주연정도 17세 안팎 고교생인 ‘걸그룹’이다(주연정은 곧 탈퇴해 3인조로 활동했다).

소녀는 매일 방과 후 서울 합정동 기획사 연습실에서 춤을 배웠다. 한 멤버는 격한 춤 연습 중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다. ‘핑클’ ‘SES’ ‘베이비복스’ 등이 요정 이미지로 인기 끌던 99년 2월 터프한 여전사 차림으로 1집 앨범 ‘Live in Hip-hop’을 냈다.

‘출석부로 나의 머릴 치시는 분, 말로 하세요∼.’ 학교 현실을 비판한 타이틀곡 ‘자유’는 너무 앞서간 노래였다. 6번 트랙 ‘첫사랑’이 떴다. 가요차트 10위권에 들었고, 풍선껌 광고에도 삽입됐다. 콘서트 할 정도는 안 됐지만 TV엔 부지런히 출연했다.

-힙합을 좋아했나 봐요?

“힙합이 뭔지도 몰랐어요. 무대 오를 때 랩과 안무를 틀리지 말자는 생각뿐이었죠. 어느 순간 돌아보니 가수 흉내만 내고 있었더라고요….”

-또 ‘분석’을 했나요?

“(웃음) 네. 2000년 8월 2집 앨범 내면서 생각해 봤어요. 잘하고 있는 건지.”

안씨는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00학번이다. 2000년 말 팀을 해체하고,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던 학교로 돌아갔다. 영어공부 삼아 CNN을 보는데 뉴스 진행하는 크리스티 루 스타우트(36·여)가 볼수록 멋있다. 어느새 다음 목표는 앵커가 돼 있었다. 그런데… 가수 하느라 학점이 너무 나쁘다.

뉴스를 배우려면 언론학부 편입부터 해야 했다. 다시 책을 잡았다. 편입시험 관건은 학점과 영어. 초등학생 시절, 외국인 회사에 오래 근무한 아버지는 “Can you pass me the newspaper(신문 좀 가져다줄래)?” 같은 질문으로 일상생활에서 짧은 영어를 가르쳐주곤 하셨다. 낮은 학점을 영어로 만회해보기로 했다.

TV 채널은 항상 CNN이거나 BBC였다. 신문은 한글 일간지와 영자지를 나란히 놓고 같은 기사를 두 언어로 읽었다. ‘단어 맵(map)’ 공부법도 개발했다. 나뭇가지를 뜻하는 branch는 지사(支社)란 의미도 있다. 이런 용례를 정리하고 유사어와 반의어를 배열하다 보면 노트는 금세 수많은 단어가 화살표로 연결된 지도가 됐다.

2003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3학년에 편입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간 기억밖에 없다. 1, 2학년 학점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2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자 어머니는 약속대로 호주 퀸즐랜드대학 어학연수를 보내줬다. “한국 유학생은 ‘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영어공부를 방해하는. 아버지께 보내는 이메일도 영어로 써가며 영어에 매달렸어요.”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2005년 초 CNN의 예비언론인 선발대회(Aspiring Journalist Awards) 인터넷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에세이를 응모해 최종 면접에 오르니 면접관이 크리스티 루 스타우트다. 상은 못 탔지만 상관없었다. 목표는 더 분명해졌다.

같은 해 6월 SBS는 수도권 뉴스를 강화하기 위해 수원과 인천에 지국을 열며 취재와 생방송을 담당할 ‘뉴스리포터’를 모집했다. 2명 뽑는데 1000명쯤 왔다. 여기서 선발된 안씨의 SBS 수원뉴스센터 첫 방송은 6월 25일이었다.

-이력서에 가수 경력도 적었나요?

“아뇨. 면접관에게 선입견이 있을까봐서요. 방송 5개월쯤 했을 때 오투포를 기억하던 시청자가 인터넷에 제 사진을 올려서 검색어 1위가 되긴 했죠.”

-일은 재미있었나요?

“폐수 방류 현장에서 폐수에 손을 담그고, 쓰레기 더미에 올라가 마이크 잡고, 고생스러웠지만 너무 좋았어요. 1년 뒤 SBS 본사로 옮겼어요. ‘뉴스와 생활경제’ 건강 코너의 취재, 제작, 생방송을 맡았죠.”

새로운 도전 욕구는 항상 징조를 먼저 보내곤 했다. 서점에 가고 싶어진다. “방송을 생각할 때는 오프라 윈프리 자서전 같은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건강 리포터를 2년째 하고 있을 땐 토익강사 유수연씨 책을 읽었죠.”

문제는 계약직이란 신분이었다. 정규직 앵커가 될 수 있을까? ‘분석’이 시작될 무렵 성균관대가 미국 조지타운대학과 함께 개설한 TESOL(영어교육자 양성 과정) 신문광고가 눈에 띄었다. 낮에는 방송국에서, 밤에는 대학에서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6개월 코스를 수석으로 마쳤다. 교수님이 졸업식 영어연설을 맡겼다. 연설에 이런 문구를 인용했다. “Don’t Settle. Stay foolish, stay hungry(안주하지 말라. 스스로 어리석다 여기고, 항상 배고픔을 느끼며 도전하라)!” 애플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한 말이다.

안씨는 2008년 여름부터 YBM어학원 서울 영등포센터에서 토익을 가르치고 있다. 주말엔 YBM시사닷컴 동영상 강의를 녹화한다. 학생 때 늘 보면서 공부했던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이 됐다. 수강생들에겐 ‘반기문 영어’를 강조한다. 유창하게 굴리는 발음보다 정확한 문법과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어휘로 또박또박 전달하는 영어를 외국인들은 더 인정한다는 논리다.

-배우, 가수, 뉴스리포터, 토익강사… 네 번의 도전과 변신을 했는데 뭐 하나 크게 성공한 건 없네요?

“벌써 성공하면 어떡해요. 아직 stay foolish 할 나이인데.”

-다음 도전은 뭐죠?

“공부를 더 많이 해야죠. 우선 영어 즐기는 법을 전해주는 유쾌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임신 중이에요(안씨는 2년 전 결혼했다). 아기를 낳고 나면 또 서점에 가고 싶어질 때가 오겠죠. 분명한 건, 여전히 hungry 해요.”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