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법 시행 1년-② 자본시장 무한경쟁 막 올랐다] “이제야 손님 대접 받네요”

입력 2010-02-03 18:49


지난 1일 대학생 김보람(가명)씨는 펀드 투자 상담을 위해 몇 곳의 은행·증권사를 방문했다가 ‘극과 극’을 체험했다. 현대증권 Y지점은 김씨의 투자 성향 조사를 시작으로 펀드 추천과 상품 소개, 자산운용사 동향과 증시 전망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상담 직원은 직접 만든 프리젠테이션 자료로 20분 가까이 펀드 투자법을 알려줬다. 총 상담 시간은 1시간10분.

30분을 소비한 하나은행 Y지점은 달랐다. 투자자정보확인서 작성 없이 구두로 간단히 투자 성향을 물었다. 대뜸 ‘하나 적립식 펀드’ 안내책자를 꺼냈다. “첫 투자라면 안정적인 적립식 주식형 펀드가 좋다”고 설명했다. 상품 세부 내용은 펀드평가사의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알아보라고 했다. 김씨는 “어디에서 펀드 가입을 할지 뻔하지 않느냐”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승패는 ‘투자자 보호·권익’에서 판가름=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투자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고수익 추구’에서 ‘위험 관리’로 이동한 것. 4일로 시행 1년을 맞은 자본시장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의 무게중심도 ‘자율과 경쟁, 확장’에서 ‘규제와 보호’로 기울어졌다.

1순위 과제는 ‘투자자 보호’가 차지했다. 금융 당국은 금융소비자 보호 전담 부서를 설치했다. 은행과 증권사 등은 먼저 투자자 성향을 분석해 위험선호도(5단계)에 따라 적합한 금융상품을 판매토록 했다. 금감원은 혹시 모를 불완전판매를 적발하기 위해 때마다 미스터리쇼핑을 나갔고 제재 수위를 높였다.

펀드 시장에선 ‘투자자 권익’에 방점이 찍혔다. 펀드운용 보고서는 투자자 눈높이에 맞춰 작성되고, 판매 수수료·보수 인하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펀드비용 낮추기가 진행되고 있다. ‘펀드 판매사 이동제’ 시행으로 투자자는 사후 서비스가 부족한 은행·증권사를 버리고 더 좋은 곳으로 자유롭게 옮길 수 있게 됐다.

최근 연금펀드에 가입한 주부 정성민(35)씨는 3일 “투자 성향 파악에 1시간 넘게 걸렸지만 제대로 알고 투자할 수 있어 안심됐다”며 “이젠 투자자를 제대로 갑(甲) 대우해주는 은행·증권사만 찾아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 승패의 열쇠가 투자자 보호와 권익 달성에 달린 시대가 온 것이다.

◇금융투자업계 “속 탄다”=이 같은 변화에 금융투자업계는 여전히 당황스럽다. ‘투자 상담이 오래 걸려 일을 할 수 없다’ ‘투자자 보호가 형식적이다’ ‘금융 당국 입김이 세졌다’ 등 불만이 많다.

그렇다고 투자자 마음도 단번에 잡히지 않는다. 증권사들은 지난해 7월 소액 지급결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유치 전쟁을 벌였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CMA 계좌 수는 지난달 5일 1000만개를 돌파하며 계속 늘고 있지만 잔고는 지난해 8월 14일 40조8722억원으로 꼭지를 찍은 뒤 지난달 말 현재 37조197억원으로 9.4% 감소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금융시장이 위축되면서 신상품 개발마저 쉽지 않아 투자자 관심 끌기도 어렵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자본시장법 시행 전 1년 동안(2008년∼2009년 2월3일) 2056개 공모형 펀드가 신설됐는데 그 가운데 부동산·특별자산·원자재 등에 투자하는 대안투자형 비중은 52%(1051개)였다. 그러나 법 시행 후 1년간 신규 펀드 수는 891개로 쪼그라들었고, 대안투자형 비중은 31%(277개)에 불과했다.

A증권 관계자는 “1년 전 연 4∼5%대였던 CMA 수익률이 현재 2%대로 하락하면서 가입이 줄고 있다”며 “투자 수익, 투자자 보호도 동시에 확실히 챙겨야 해 속이 탄다”고 말했다.

◇투자자 보호·권익 강화, 기회로 삼아야=그러나 금융투자업계가 투자자 보호·권익 강화를 놓고 진검승부를 내는 것이야말로 미래 성장을 보장하는 정도(正道)라는 지적이 많다. 금투협 박병주 증권서비스본부장은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투자자 보호보다는 ‘고위험 고수익’에 방점이 찍히면서 미국처럼 폭탄을 키웠을 수 있다”며 “자본시장법 시행 초기 투자자 보호, 위험 규제 등이 부각된 것은 한국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평가했다.

글로벌 금융시장 위축 탓에 ‘국내’로 새삼 눈을 돌리고 소액투자자부터 끌어당기면서 자본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기회를 잡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증권 ‘POP’, 우리투자증권 ‘옥토폴리오’, 현대증권 ‘QnA’, 대우증권 ‘STORY’ 등 현재 증권사들은 각종 브랜드를 내세워 수십만원 투자자부터 흡수하려는 자산관리 시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김정현 기자 kjhyun@kmib.co.kr 오다정 대학생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