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처럼 키웠는데”… 구제역 소 살처분의 그늘 축산농민의 트라우마

입력 2010-02-02 22:27


허탈감에 심적 고통 호소 “수질오염·위생 큰 문제”

김영석(53·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씨는 2일 “소를 묻은 뒤 아직까지도 소화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길게는 10년 동안 같이 살아온 소들을 하루아침에 파묻었으니, 그 허탈한 심정이야 인지상정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씨는 지난달 16일 구제역 때문에 키우던 소 57마리를 집에서 50m쯤 떨어진 밭에 묻었다. 57마리 모두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멀쩡한 소였지만 예방 차원에서 살처분하라는 당국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포천 연천 등 경기 북부 지역 축산농민들이 살처분 후의 트라우마(충격적 경험 뒤의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0년 안팎으로 정을 쌓아온 소를 살처분한 죄책감과 함께 텅빈 우사를 지켜봐야 하는 허탈감, 수십년 해오던 농장일을 갑자기 놓게 된 충격 때문에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방역 당국은 지난달 7일 구제역 첫 발생 이후 2일 현재까지 소 2475마리와 돼지 1335마리를 살처분했다. 당국은 이날 추가로 소 500마리와 돼지 1500마리에 대한 살처분을 결정했다. 지금까지 살처분에 응한 가구는 54가구지만 구제역이 다시 확산세여서 대상 가구가 계속 늘 전망이다. 농민들의 충격이 큰 것은 여느 동물과 달리 소와 사람의 정서적 교감이 유별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살처분 대상은 비육우가 아니라 95% 이상이 젖소다. 경기도청 가축방역과 이은경 주사는 “젖소는 농민들이 매일 아침과 저녁 두 번 유방을 주물러주고, 뜨거운 수건으로 마사지하는 등 아주 밀접한 접촉을 한다”며 “육체적 접촉으로 정을 쌓아온 동물이다 보니 도저히 죽이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마음이 여린 노인과 여성의 충격은 더 심각하다.

아울러 살처분 장소도 후유증을 키우고 있다. 방역 당국은 이동 중 2차 감염을 우려, 축사 바로 근처 땅에 파묻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이 매일 소를 묻은 곳을 볼 수밖에 없고, 핏물이나 썩은 물이 흘러나와 위생 문제와 수질오염 걱정도 크다는 것이다. 포천·연천이 지역구인 한나라당 김영우 의원은 “심리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게 선진화된 살처분 방법을 도입하고, 중앙 정부가 나서서 농민들의 공황상태를 다독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보상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