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현 놀라운 사상세계 외면하는 현실 안타까울 뿐”

입력 2010-02-02 18:00


정년 앞둔 이상현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지난달 29일 서울 구기동 구기터널 부근에 있는 한국고전번역원을 찾았다. 한국고전번역의 산실이라기에는 다소 초라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4층 402호 연구실로 들어서니 이상현(60) 수석연구위원이 반갑게 맞는다. 그는 지난해 최치원(857∼?)의 ‘계원필경집’을 최초로 완역해 주목을 받았던 고전번역의 권위자로 오는 6월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연구실 한쪽 벽 서가에는 고전 원서들과 번역본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같은 방에 있는 동료 선임연구원 2명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5층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휴게실은 썰렁했다. 난방시설이 없어 석유난로를 피워야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몸으로 체득되었다.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인 이 수석연구위원은 서른이 넘어 고전번역의 세계로 뛰어든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였으나 1980년 신군부 집권 후 강제해직됐고, 제2의 길로 택한 것이 고전번역이었다. 해직 후 동국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다 민족문화추진회(민추)의 국역연수생 모집 공고를 보고 마음이 끌려 지원한 것이 인연이 됐다. 민추는 2007년 11월 출범한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이다. 1965년 박종화 이병도 최현배 신석호 이은상 이희승 등 학계와 예술계 원로 50여명이 참여해 만든 민간기구이다. 82년 민추 국역연수생 9기(40명)로 선발된 그는 연수생 시절 사서오경, 자치통감 사기 등 고문헌을 통해 한학을 공부했다. “밤을 세워가며 무지막지하게 공부를 했어요. 엄청나게 많은 고전을 읽으며 한학의 세계로 푹 빠져들던 시간이었지요.”

그는 2년의 연수생 과정을 마치고 3년 과정의 상임연구원(일종의 박사과정) 과정까지 밟은 뒤 87년부터 민추에서 본격적으로 고전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부터 시작했지만 경륜이 쌓이면서 문집번역에 전념하다시피 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신흠(1566∼1628)의 ‘상촌집’, 장유(1587∼1638)의 ‘계곡집’, 이식(1584∼1647)의 ‘택당집’을 번역했다. 이들 3명은 월사 이정구(1564∼1635)와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명성을 날린 학자들이다.

이어 도전한 문집이 최립(1539∼1612)의 ‘간이집’. 최립의 문장은 당시 사대부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할 정도로 난해해 그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번역에 너무 몰두한 탓인지 허리디스크로 한 때 하반신이 마비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완역할 수 있었다. 이어 고려말기 문인 이색(1328∼1396)의 ‘목은집’, 조익(1501∼1572)의 ‘포저집’, 목은의 아버지 이곡(1298∼1351))의 ‘가정집’, 이숭인(1347∼1391)의 ‘도은집’을 잇따라 번역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문집을 번역하면서 선현들의 사상세계의 방대함과 심오함을 발견하고는 놀랐다고 한다. “우리 선현들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사상가, 문장가들이 참 많아요. 괴테나 톨스토이, 셰익스피어는 알아도 우리의 보물은 알아보지 못하는 무관심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도은집’에 이어 도전한 것이 신라시대 명문장가 최치원의 ‘계월필경집’과 ‘고운집’이었다. 사륙변려문으로 쓰여진 ‘계원필경집’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됐고, 유명한 문집이지만 너무 어려워 번역자들이 도전하기를 꺼려했던 문집이다. 한문에 능한 것은 물론이고 신라와 당나라의 정치·역사·문화는 물론 고사(古事)에도 능통해야 시도할 수 있는 문집이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3년간 씨름한 끝에 고운집(1권)과 계원필경집(전 2권) 1권의 번역을 끝낼 수 있었다. 계원필경집 2권은 현재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번역한 고전은 문집만해도 30권이 넘는다. 문집 1권이 보통 200자 원고지 1800∼2000장 정도니 원고지 6만장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그는 30대 중반 이후 20여년을 고전번역에 바쳤다. 요즘도 번역에 방해되지 않도록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다닐 정도다. 고전번역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고전번역교육원 연수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번역작업에 쏟아 붓는다. 휴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인 고전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했다. 고전번역 없이는 우리의 기록문화에 대한 이해는 물론 전통의 계승이 불가능하다는 것. “1894년 갑오경장 이전 우리의 모든 공식문서는 한문으로 작성됐어요. 선조들이 남긴 기록유산들이 아무리 귀중하다해도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접근이 차단돼 있지요.”

그는 “고전 번역은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적 자산들을 현대인들이 맛볼 수 있는 요릿감으로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한 선현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은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그 분을 살려내 우리 시대에서 걸어 다니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고전은 문장이 함축적이고, 유래도 찾기 어려운 온갖 고사와 비유가 담겨 있어 제대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10년은 공부해야 겨우 첫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는 어려운 분야지만 번역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높지 않다. 급여 수준도 높지 않은데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지만 선배 번역가들은 춥고 배고프고, 알아주는 이도 없는 척박한 풍토 속에서 고전번역에 헌신했다”며 “그분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년퇴직을 하더라도 번역을 계속할 생각이다.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사명감도 있지만 선현들의 사상세계를 알아가는 데서 오는 개인적인 재미와 희열도 만만치 않지요.” 그는 “퇴직 후에도 매년 2권씩 번역해 100권을 채우고 싶다”는 농반진반의 소망을 털어놓으며 싱긋 웃었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