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경애 (7) 버팀목이던 어머니 사고로 잃고 깊은 절망
입력 2010-02-02 17:37
2007년 7월 19일 오전 10시50분. 사랑하는 어머니의 칠순 선물로 마련한 헌정 시집을 품에 안은 채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했다.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비행기에서 내리기 두 시간 전부터 머리가 몹시 아팠다. 그때는 잠을 못 자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고 나오는데, 아들 존이 소리쳤다. “엄마, 외삼촌이 빨리 전화하시래요.”
뭔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동생의 전화번호를 누르는데 손이 떨리고 마음이 불안했다. “누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어.”
수화기를 타고 동생이 울면서 말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겨우 존의 부축을 받고 이동할 수 있었다.
남편이 집을 나간 뒤 나는 부쩍 어머니를 의지하며 살았다. 모든 것을 어머니와 상의했고, 매일 어머니와 대화를 해야만 마음이 안정됐다. 아이들이 나에게 투정을 부리면, 나는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위로받곤 했다. 그런 어머니가 언제부터인가 “이젠 네 스스로 알아서 해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이런 때를 미리 알고 그러셨던 것인지….
막내 조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했다. 함께 여행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해드리고, 밤을 새우며 이야기도 나누고, 특히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이가 고교를 졸업하기 직전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나는 몇 달간 움직이지 못했다. 왜 살고 일해야 하는지,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상실감이 컸던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 이곳저곳이 아팠다. 머리가 터질 듯해 좀처럼 성경도 읽지 못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의사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진통제에 의지해 살았다.
‘만약 어머니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뭐라 하실까.’ 그분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고 있는 거니? 네 편을 들어주는 아이들은 생각지도 않는 거니? 이제부터 너는 울어도 가슴으로 울어야 해.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야 해!”
비로소 성경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아직 제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조이도 대학에 보내야 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 정도 흘렀을까. 차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막내딸 조이는 대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이가 처음 원서를 낸 곳은 스탠퍼드대였다. 사실 어머니와 나는 조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하버드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 조이의 모습을 매일 그림으로 그렸다.
하지만 조이는 스탠퍼드대가 명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따뜻한 지역에 있고 주거환경이 애틀랜타와 비슷해 공부에 집중하기 좋을 것 같다며 그 대학을 선호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다. 그런데 결과는 ‘불합격’. 조이는 믿기지 않는 듯 며칠을 계속 울었다. 아이도 그렇지만 나를 비롯, 학교에서조차 실망이 대단했다. 왜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조사단을 꾸려야겠다고까지 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