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42)
입력 2010-02-01 17:49
누룽지
목사들 몇이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나는 보리밥이나 먹었으면 싶었지만 모두들 ‘오리고기’를 합창했다. 반은 벌거숭이로 또 반은 뻘건 고추장을 묻혀서 나온 고기를 이글거리는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런데 옆 식탁에서 나이 지긋하신 부부가 먹는 음식이 뭔가 달라 보였다. 종업원이 ‘누룽지 백숙’이라고 알려줬다. 백숙을 하려면 쌀을 넣어야지 왜 누룽지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해야 더 구수하다고 대답했다.
똑같은 쌀, 똑같은 솥으로 밥을 지어 먹어도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은 누룽지를 만들지 않았다. 우리나라 엄마들만 그렇게 밥을 짓고 누룽지를 만들어 거기 물을 붓고 숭늉까지 만들어 먹었다. 혹자는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은 차를 마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밥을 펀다는 것은 뭔가를 덜어내는 마이너스 행위이다. 가득 부풀어 올랐던 밥을 빼내는 것이다. 그 때 엄마의 마음은 텅 비어 가는 솥을 보면서 가슴도 떨어져 나간다. 가슴이 아려진다.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뭐 없을까? 그런데 눌은 밥을 만들고 거기다가 물을 부었더니 다시 부풀어 오르지 않던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만들어 다시 하나의 가득한 솥으로 이어가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항상 넉넉한 마음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마이너스 요소를 플러스로 받아들이려는 창조성의 사고라는 말이다.
일본 사람들은 누룽지를 마이너스 요인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전기밥솥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그걸 플러스로 바꿔서 백숙도 하고 숭늉도 만들어 낸다. 마이너스 지대에서 플러스 지대로 옮겨가는 연금술이 바로 누룽지 만드는 일이다.
성능 좋은 밥솥이 나와서 누룽지를 구경하기가 어렵다. 있긴 있지만 공장에서 일부러 눌러 만든 거다. 그런 누룽지는 사실 있으나마나다. 누룽지 없이 산다는 거, 누룽지가 생기는 게 손실이라고 여기는 게 문제다. 감성의 마이너스 지대에 그 영혼이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와 집착만 있고 나누어 누림이 없는 광야에서 산다는 뜻이다.
<허태수,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