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경애 (6) 아픔 겪으며 너무 일찍 철든 아이들에 늘 미안
입력 2010-02-01 18:28
아들 존이 고교 3학년 때 학교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학교 공부, 대입 준비, 운동,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등 모든 게 그 아이에게 짐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자신이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감이 컸던 것 같다. 하필이면 내가 사업차 중국 상하이에 출장 갔을 때 그렇게 된 것이다. 존은 엄마가 걱정할까봐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아들은 졸업시험 등으로 바쁘게 지내다 졸업식을 끝내고 나서야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존을 데리고 병원 응급실로 직행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아직까지 존이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에요”라며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들 몸 안의 피가 50%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신경성 위염으로 시작된 것이 위궤양이 됐고 그것이 위벽에 내출혈을 일으켜 결국 과다출혈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서둘러 응급 수혈을 받고 위내시경 등 종합검사를 했다. 병원에 며칠간 입원해 휴식을 취한 뒤 3개월간 통원 치료를 받았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을 뻔했으니 내 마음이 어땠겠는가. 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 달라고, 건강하게 고쳐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다. 그때 일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사업장은 직원들에게 맡겼다. ‘혹 나를 필요로 할 때 돈을 번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밀려왔다.
우리 아이들은 또래들에 비해 참 어른스러웠다. 어렸을 때 아픔을 겪으면서 일찍 철든 것이다. 하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그게 고맙기보다 오히려 미안할 때가 많았다.
큰딸 그레이스는 어릴 때부터 맏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존과 조이는 뭐든 그레이스를 따라했다. 특히 막내 딸 조이는 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언니가 체조를 하거나 피아노를 치면 그 옆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레이스는 내게도 친구 같은 존재이면서 때론 선생님 같았다.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나 옆에서 나를 겪려해줬다. 한번은 내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레이스는 “엄마, 세계는 하나예요. 누구나 똑같아요”라며 나를 ‘훈계’했다.
존과 함께 교회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목사님이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니?”
괜히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애들 아빠에 대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말도 없었다. 가장 아이들이 예민할 때 가족을 버려두고 집을 나갔으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고통의 터널을 나오기까지 아이들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아이들에게조차 아빠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그날 목사님께서 존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의 마음은 나와 달랐다. “예, 저는 아버지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키 크고 잘 생긴 외모를 받았습니다.”
그 아이의 음성을 듣는데 왠지 울컥했다. 아들은 어느새 내 마음을 읽었는지, 손을 꼭 잡아줬다. 그리고 세미나를 마치고 나올 때 존은 말했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저를 낳아주신 분이고, 아빠가 계셨기에 제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요. 엄마가 할 수 없으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세요.”
아들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귀한 아이들을 낳게 해줬는데, 왜 용서를 못하겠는가. 어느새 성장한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게 엄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