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미술이 만나 심층을 표현하다… 박범신·안종연의 ‘시간의 주름’전
입력 2010-01-31 17:50
소설가 박범신(64)이 말했다. “내가 쌀을 주었으니 당신이 그것으로 떡을 만들든 밥을 짓든 마음대로 하시오.” 여기서 쌀은 50대 남성의 극한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린 그의 장편 소설 ‘주름’(2006)이었다. 3년 전 사단법인 문학사랑과 대산문화재단이 ‘2010 문학과 미술의 만남 전’을 위한 문학가로 박범신을 선정했을 때의 일이다.
미술인 안종연(58)이 응수했다. “처음엔 쌀(주름)만 주더니 이것(촐라체·2008)도 넣어라, 저것(고산자·2009)도 섞어라고 주문해 맛있는 떡도 만들고 잡곡밥도 지었다.” 여기서 잡곡밥은 스테인리스 스틸과 두랄루민 등 금속 화면에 전기 드릴로 ‘주름’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고, 떡은 유리와 나무판에 각각 그려낸 ‘촐라체’와 ‘고산자’를 말한다.
두 작가는 전시 기획이 구체화된 2007년 처음 만났다. 선 굵은 문체로 그림같은 묘사력과 섬세한 감성을 표현하는 박범신이나 여러 가지 매체를 이용한 공간 연출력이 뛰어난 안종연이나 생성과 소멸 등 시간과 우주에 대한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금세 의기투합했다. 박범신의 소설은 안종연의 시각예술로 새로운 빛을 얻었다.
서울 국립암센터, 삼성생명 종로타워, 교보생명 건물 등에 ‘빛의 작품’을 설치한 안종연은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 아프리카 대륙과 스코틀랜드를 지나 바이칼호에 이르는 소설 속 남녀 주인공의 삶을 금속판에 드릴로 수천 수만 번의 점을 찍는 작품으로 나타냈다. 나무에 인두로 지져 그린 ‘고산자’와 유리구슬과 홀로그램으로 묘사한 ‘촐라체’도 흥미롭다.
‘박범신과 안종연의 만남’전이 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 전관에서 펼쳐진다. ‘시간의 주름’(groove of time)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전시에 진열된 작품 제목은 소설의 목차와 같다. 작가가 배치한 동선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새 소설 속 장면들을 여행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읽는 소설’에서 한 발 나아가 ‘보는 소설’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박범신은 ‘주름’에 대해 “시간의 주름살이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감금해 가는지 진술했고, 그것에 속절없이 훼손당하면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반역하다 처형된 한 존재의 내면 풍경을 가차없이 기록했다”고 말한다. 이에 안종연은 미니멀한 평면과 조각, 영상과 입체 등 다양한 영역을 오가며 보고 듣고 느끼는 공감각적 명상으로 작업했다.
이번 전시는 기존 시화전 형식의 문학과 미술의 만남을 넘어 심층의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종연은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문학적 서술 자체를 시각화하기 보다는 소설의 주제 의식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했다. 이들의 만남은 새로운 예술 생산을 견인하고, 나아가 탈 장르 소통이라는 문화적 새 경향을 이끈다.
두 사람은 오는 5월 29∼31일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가족과 함께 떠나는 문학미술기행’을 진행한다. ‘죽음보다 깊은 밤’ ‘풀잎처럼 눕다’ ‘겨울강 하늬바람’ 등 빛나는 상상력과 역동적인 서사로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박범신의 문학과 제주도 피닉스 아일랜드에 ‘광풍제월’을 설치한 안종연 미술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02-720-1524).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