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경애 (5) 백화점서 장사하며 삼남매 뒷바라지 ‘고된 나날’

입력 2010-01-31 19:43


방송국을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백화점에 작은 주얼리 숍을 오픈했다. 태어나서 장사란 건 처음 해봤다. 그런데 아이들과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덤비니 그것도 적성에 맞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포도 하나씩 늘어 다섯 개의 숍을 운영하게 됐다.

물건은 애틀랜타에 있는 도매상을 주로 이용했고, 가끔 한국의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가져다 팔았다.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꼭 맞게 찾아주니 백화점 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경기가 불황일 때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쌓이는 납부 고지서를 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런 날이면 특히 아이들 학비나 기타 학업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솔직히 미국도 과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운동부 등록비, 운동 장비 구입비, 유니폼 구입비, 대회 나갈 때마다 드는 출전비, 악기 구입비, 서클 활동비, 캠프비, 학용품 구입비, 프로젝트 비용 등… 아이가 셋이다 보니 그 부담감은 더했다.

한국은 공부를 위해 과외를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다방면에서 고루 실력을 갖춘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 공부보다 예체능에 오히려 더 많이 투자한다.

큰딸 은혜는 고교 때 다이빙 선수였고, 아들 성찬은 육상과 펜싱 선수, 막내딸 은희는 육상과 배구 선수였다. 모두 학교 대표로 활동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 기타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아이들 각자가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 하니 아무리 돈이 들고 육체적으로 고단해도 하지 말라고 말릴 수 없었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요, 사업가로 참 바쁘게 살았다. 한밤중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 너무 피곤해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잠든 적이 많았다. 그럼 경찰이 깨워 나를 에스코트해주기도 했다.

세 아이는 또 아이들대로 바빴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매일 세 시간 가량 연습을 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경기를 치렀다. 그러고 나면 밤 10시를 훌쩍 넘겨서야 집에 돌아왔다. 씻고 간식을 먹고 나면 11시, 그때부터 아이들은 밀린 숙제나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럼 나도 옆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다. 성경책을 보거나 시를 썼다. 혹시 아이들이 졸까봐 보초를 서는 것이다. 몸이 천근만근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아도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기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나는 새벽 5시면 일어나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사춘기인 아이들은 나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른 채 가끔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폭발시키기도 했다. 그 또한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아이들도 힘든데, 풀 데가 없으니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느새 엄마는 샌드백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무조건 참고 인내하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견디기 힘들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주님, 제가 얼마나 더 울어야 합니까?”

이렇게 울먹이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느새 다가오셔서 내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내가 너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리라.”

그러면 또 거짓말처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