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주은] 스타일이 힘이다

입력 2010-01-28 18:49


‘꿀벅지’는 요즘 젊은 여자들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신조어이다. 적당히 살집이 있으면서 운동을 많이 해서 건강미가 넘치는 탄탄한 원통형 다리는 점점 탄력을 잃고 하체가 빈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 그 자체이다. 다리를 드러내면서부터 여자들은 자유롭고 건강해졌다.

따져보면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매력은 풍만한 가슴과 가냘픈 허리에 있었을 뿐, 늘씬한 각선미로 평가되지는 않았었다. 패션 디자이너 샤넬이 치렁치렁 땅에 끌리는 치마를 무릎 선 위로 적당히 잘라 이른바 샤넬라인으로 선보이면서, 처음으로 여인의 하얀 다리가 노출되고 그 부분에 시선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슴과 허리를 강조해야 했던 시절, 서양의 숙녀들은 코르셋으로 몸통을 꽉 조여매고 치마 속으로는 심지가 있는 언더스커트를 넣어 풍성하게 부풀리는 옷을 입었다. 언젠가 박물관에서 쇠로 만들어진 16세기경의 코르셋을 본 적이 있는데, 뭐랄까, 여성용 갑옷 같다고나 할까. 치마 속으로는 육중한 심지가 허리의 좌우로 붙어 마치 체조용 뜀틀 매트를 부착한 듯 보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 고래 뼈대로 축을 넣어 끈으로 꽁꽁 엮어 매는 방식으로 코르셋은 진화하였고, 치마 속 매트는 새의 깃과 철사로 만든 틀로 바뀌었다.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불편하기는 여전했다. 허리를 18인치로 졸라주는 코르셋 때문에 여자들은 종종 현기증을 일으켜 휴식을 취해야 했으며, 나들이를 가다가 쓰러지는 일도 흔했다.

그런가 하면 크리놀린이라 부르는 언더스커트는 금세 불이 붙는 재질로 만들어진데다 혼자서는 쉽게 벗어버릴 수가 없어 난로나 촛불에서 불이 옮겨 붙으면 피할 길이 없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해마다 대도시에서 평균 3000명 가량의 여성이 치마에 불이 붙는 사고로 숨졌고, 그 밖에도 마차에 치맛자락이 끼어 부상을 입은 여성의 수는 연간 2만 명이 넘었다.

참다못한 여성해방론자들은 “우리에게도 신체의 자유를 누리며 활동할 권리가 있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들의 호소력 있는 계몽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라지지 못하던 코르셋과 크리놀린 패션이 삽시간에 막을 내린 것은 놀랍게도 바로 샤넬이 제시한 새로운 스타일 덕분이었다.

샤넬은 허리부분을 느슨하게, 치마는 무릎 근처까지 올라가게 디자인했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그녀의 옷은 활동적이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손으로 쥐고 있어야 했던 핸드백에는 체인으로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게 했는데, 그 덕분에 여자들은 양 손의 자유로움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스타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세상을 바꾸어놓는다. 드디어 숙녀들은 젠틀맨이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넘어지는 일이 없었고, 마차에도 쉽사리 올라타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타일의 힘 아닐까. 어려운 논리를 세우는 일보다 멋진 스타일을 제안하는 일이 한 수 높은 경쟁력일지도 모른다.

이주은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