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원짜리 절도범… 우리라도 살펴야”
입력 2010-01-28 14:48
국선변호인 김 광 순
2주간 동행취재… 두번째 이야기
“변호사님, 저 올려치기 당했어요.”
27일 오전 10시20분, 휴대전화를 받은 국선변호인 김광순(사시 46회) 변호사가 “같은 집행유예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라”며 달랜 뒤 전화를 끊었다. ‘올려치기’는 상급심에서 원심보다 더 높은 형이 선고됐다는 뜻이다.
전화한 A씨는 2007년 여자 초등학생 허벅지를 쓰다듬고(미성년자 강제추행) 지난해 다시 이 학생에게 전화를 건 혐의(추행유인미수)로 기소됐다. 1심에서 무죄였던 추행유인미수가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혀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자 하소연한 것이다.
“이래서 제가 선고 공판을 안 가요.” 김 변호사가 겸연쩍게 말을 이었다. “변호사로서 가장 힘들 때는 피고인이 법정구속되는 거죠. 제 눈앞에서 피고인 손에 수갑이 채워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는 로펌 근무 때 이 경험을 한 뒤 선고 재판에 가급적 참석하지 않는다. 김 변호사는 1년6개월간의 로펌 생활을 접고 지난해 3월부터 서울고법 소속 국선변호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두순 사건 이후 성범죄 처벌이 더 무거워져서 이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쩔 수 없죠.” 김 변호사는 곧 두툼한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이날 아직 공판 4건이 남아 있었다.
첫 재판이 마지막 재판
21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508호 법정은 통로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나라당 김정권 의원 항소심 때문이다. 무죄가 선고되자 지지자들은 김 의원 이름을 연호하며 법정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난 방청석엔 두세 명만 앉아 있다. 비로소 국선변호인의 변론이 시작됐다. 1시간에 6명 재판, 피고인 1명당 허락된 시간은 10분 안팎이다.
노래방 종업원 이모(48)씨. 지난해 노래방 주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현금 20만원과 3만원짜리 마른 오징어와 한치 안줏거리를 훔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징역 10개월)에서 20만원 절도 부분이 인정되지 않자 검찰이 항소했다. 이날이 첫 공판이다.
“원심이 무죄를 선고한 부분은 명백히 사실을 오인한 것입니다.” 검사가 간단히 항소 이유를 밝혔다. 김 변호사는 “이씨가 노래방 불법영업을 신고하자 피해자가 갑자기 20만원 절도 얘기를 꺼냈다”며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제외하면 검찰은 수사검사 대신 공판검사가 재판에 임한다. 대부분 서면으로 싸울 뿐 법정에서 공방이 오가지 않는다. 양측은 각자 주장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재판부는 이날 바로 결심(結審·재판 변론 종결)을 했다. 첫 재판이 마지막 재판이 됐다. 선고는 다음달 4일.
항소심 국선변호인에게 월 20건씩 새 사건이 배정되는 것도 재판 진행이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고인이 갑자기 돌출 행동을 하면 재판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재소자끼리의 법률상담
“피고인이 항소이유서 심신장애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던데요?” 27일 오전 10시 서울고법 508호. 재판장이 묻자 변호인석의 한 국선변호인이 화들짝 놀라 옆자리 피고인을 바라봤다.
“아, 그게…. 지난번 접견에서 그런 말이 없었거든요.” 변호인이 어렵게 답변하자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이곤 “항소 이유를 정리해 달라”며 공판을 마쳤다. 피고인이 변호인과 상의 없이 심신장애를 주장한 것이다.
“저러면 변호인이 한 번에 끝낼 일을 몇 번씩 다시 해야 돼요. (피고인이) 저러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담당 사건 재판을 기다리며 이 광경을 목격한 김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들끼리 멋대로 법률상담을 하기 때문이에요.”
교도소에는 전과기록이 화려한 재소자가 많다. 이들은 ‘신참’에게 각자 경험을 토대로 ‘법률상담’을 한다. 피고인이 느닷없이 무죄를 주장한다거나 새 증거를 들이민다면 십중팔구 이런 경우다. 변호인이 설득해 제지하지 못하면 재판이 파행을 겪는다. 지난해에는 이웃 사람을 흉기로 30여 차례 찌른 살인범의 국선변호인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피고인이) 끝까지 우기면 말릴 수가 없잖아요. 항소 이유서 끄트머리에 ‘선처를 바란다’고 한 문장 더 넣을 뿐이에요.”
피고인 실종사건
“혹시 오○○님?”
20일 오전 10시50분. 재판 시작을 10분 앞두고 김 변호사가 좌불안석이다. 얼굴이 붉어진 채 복도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오○○인지, 오○○를 아는지 묻고 다녔다.
오씨는 사기 혐의로 공범 6명과 함께 기소돼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검찰이 항소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였고 서류들은 반송됐다. 법정에는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함께 기소된 피고인들도 놀란 표정이다. 재판 1분 전. 김 변호사가 서류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때 잿빛 점퍼 차림의 남성이 법정 출입문을 향해 걸어왔다. 김 변호사가 번개같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오○○씨?” 깜짝 놀란 남성이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님헌티 전화혔어야지. 내가 뭔 죄를 졌다고 재판을 안 오겄어.” 실종됐다 나타난 피고인이 되레 역정이다. 한마디 하려던 김 변호사가 오씨 등을 떠밀며 법정으로 들어갔다. 재판이 시작되니 이번엔 공범 피고인 이모씨가 사고를 쳤다. 오씨 외에 다른 공범들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김 변호사는 이씨도 변호하고 있다.
“재판장님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이게 범죄인지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 이씨가 울먹이며 진술하는 동안 김 변호사 얼굴이 굳어져 갔다. 진술이 끝나자 재판장이 언성을 높인다.
“피고인이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말합니다. 공모죄는 범죄 일부에만 가담해도 적용됩니다.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야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옳지 못한 말입니다.”
방금 이씨는 법률적으로 무죄를 주장했다. 당초 김 변호사와 상의해 제출한 항소 이유는 ‘형량을 줄여 달라(양형부당)’는 취지였다. 김 변호사가 변호인석에서 고개를 숙였다.
월화수목금금금
김 변호사는 서울고법 형사합의 4부, 7부, 10부 사건을 담당한다. 월요일 빼곤 모두 재판이 있어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일요일인 24일에도 경기도 광명시 자택 인근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1심 무죄였던 외국인 여성 성폭행 피고인 기록을 검토했다.
오후 6시 전화벨이 울렸다. 6개월 전 종결된 성폭행 사건 피해자다. 당시 피고인과 동거했던 피해자는 피고인이 보복하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해줬다. “덕분에 형량이 1년 줄었어요. 출소까지 2년6개월 남았네요. 피고인이 고마워하고 있어서 보복당할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김 변호사는 밤 11시가 다 돼서 도서관을 나왔다. 다음날 오전 어김없이 9시에 사무실로 들어선다. “장가가야 하는데, 이런 생활을 이해해주는 여성이 나타나겠죠?” 33세 총각이 멋쩍게 웃었다.
지난 18일부터 동행 취재한 이후 3000원짜리 도시락 저녁식사를 11일 만에 벗어나 28일 저녁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가장 답답할 땐 언젠가요.
“피고인에게 충분한 조언을 해주지 못할 때죠.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기도 하고, 우리가 적극 응하지 못할 때도 있죠. 어느 경우든 결과는 좋지 않아요.”
-후회되지는 않나요.
“사명감 갖고 일하는 게 좋아요. 재판 끝나고 거나하게 접대받진 못해도, 소소한 감사편지는 자주 받아요.”
-체감하기에 국선변호인 위상이 어떤가요.
“요즘은 주요 시국사건도 국선변호인이 맡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참여정부 관련 사건을 하나 맡고 있어요. 김윤옥 여사 사촌언니 김옥희씨 건도 국선변호인이 담당했어요. 위상이 달라지고 있죠.”
국선변호인은 호화 수사진과 대형 로펌이 동원되는 전쟁터에서 달리 기댈 곳 없는 이들 편에 선다. 3만원짜리 오징어 절도범이 붙잡을 수 있는 사법체계의 마지막 안전장치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