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知·識의 거리
입력 2010-01-28 18:13
지인 중에 유명 연예인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그 연예인과 마주친 지인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더란다. 둘은 그 전까지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사이였다. TV 화면을 통해 자주 대하다 보니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다행히 미소로 화답해 준 덕에 민망함은 덜었다지만, 무척 멋쩍은 일이었을 게다.
‘안다’는 말만큼 애매한 단어도 드물다. 내가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오다가다 지나치면서 겨우 낯이 익은 사람도 ‘아는’ 사람이고,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어쩌다 이름을 알게 된 사람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수십년을 같이 살아 온 배우자조차 ‘모르는’ 사람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2+2=4’나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처럼 인류가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앎’도 있지만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처럼 ‘나만이 아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앎’도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실용적 실천적 앎을 프로네시스, 이론적 철학적 앎을 에피스테메로 구분했다. 에피스테메라는 단어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역사가 미셸 푸코가 ‘한 시대에 공통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생각의 토대’라는 어려운 의미로 사용하면서 현대의 인문사회과학 용어로 정착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한자 문화권에서도 그와 유사한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묶어 표현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구분하자면 ‘지(知)’와 ‘식(識)’은 각각 다른 ‘앎’을 지칭했다.
한자의 지(知)는 ‘화살 시(矢)’와 ‘입 구(口)’를 나란히 놓은 글자다. 화살로 자기 입을 찌르면 안 된다는 ‘사실’은 체계적으로 배워야 아는 것이 아니다. 흙을 먹으면 안 된다거나 돌로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거나 뜨거운 물에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들은, 아이가 어릴 때 한두 번만 가르치면 된다. 이런 ‘앎’에 이르는 데에는 예습 복습이 필요 없다. 그래서 ‘생이지지(生而知之)’라 한다. 지(知)란 사람이 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 곧 오성(悟性)으로 얻는 앎이요, 경험으로 깨닫는 앎이다.
반면 ‘말씀 언(言)’ ‘소리 음(音)’ ‘창 과(戈)’로 구성된 식(識)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얻는 ‘앎’이다. ‘학이습지(學而習之)’, 즉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배우지 않아도 응당 알 수 있는 일들을 모르는 것을 ‘무지’하다, 또는 강조해 ‘무지막지’하다고 하지 ‘무식’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무식’은 다만 배우지 못한 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식’을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똑같이 가르쳐도 똑똑한 사람이 더 많이 배우는 법이다.
근대 이전 신분제 사회를 지탱한 일반적 믿음은 양반 귀족은 다른 신분의 사람들과 천품(뼈대 혹은 혈통)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양반 귀족은 이런 믿음을 근거로 교육의 기회를 독점했다. 양반끼리는 서로를 ‘무식’하다고 흉보았고, 천민에게는 ‘무지렁이’라고 욕했다. 타고난 신분이 지적 능력을 결정한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깨지고 난 뒤 천한 사람도 배우면 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열망이 우리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 사회와 경제의 역동적인 변화는 이 교육열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런데 신분제가 폐지된 뒤에도 ‘지적 능력’이 정확하게 평가된 적은 없었다. 사회적 배경이나 경제력이 지적 능력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향이 새로 나타났기 때문에 ‘지’와 ‘식’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문제는 그 거리다. 그 거리가 줄어들면 조상 탓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 거리가 늘어나면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지난해 말 한국개발연구원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지’와 ‘식’ 사이의 거리가 그만큼 멀어지고 있다는 표시다.
맹자(孟子)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로 꼽았다. 특목고든 대학이든 ‘부모 덕에 이미 많이 배운 학생’이 아니라 ‘앞으로 잘 배울 수 있는 학생’을 뽑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지’와 ‘식’ 사이의 거리를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