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성기] 분노로는 골을 못 메운다
입력 2010-01-27 18:13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공중부양’ 위력을 과시한 국회폭력 사건과 광우병 촛불시위의 불씨를 던졌던 ‘PD 수첩’ 제작진에 대해 잇달아 무죄가 나와 법원 판결을 둘러싼 갈등의 골이 험하게 깊어졌다. 법원 판결과 이에 따른 검찰 반발이 여야 정치권 대립과 보수단체 반발 시위로 불거지면서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에서는 단독재판부를 맡은 몇몇 소장 판사들이 교묘하게 조작된 논리로 법리에 어긋난 판결을 내려 국기와 법치의 근간을 훼손하고 있다며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른바 진보를 표방한 일부 법관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를 배후로 지목하면서 이들을 용인해 온 이용훈 대법원장의 책임을 거론했다. 야당과 반대편 진영에서는 법률과 법관의 양심에 따른 당연한 판결을 여당과 보수 세력이 힘으로 찍어 눌러 사법부 독립을 흔들고 있다고 항변한다.
급기야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을 비롯한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19일 강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동연 판사 집 앞에 몰려가 시위를 벌이고 21일에는 출근하는 이 대법원장 차량에 달걀을 던지며 사퇴를 요구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그동안 이 나라의 보수가 행동은 없이 너무 물렁하게 보여 좌파 세력이 설치는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며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를 보였다. 오죽했으면 이 엄동에 새벽부터 노인들이 나서서 목청을 높이고 시위를 벌였겠느냐는 설명이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기까지 가장 헌신한 분들은 바로 어르신 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정 세력이 국민을 오도해 나라가 흔들릴 지경에 이르면 공분에 떨며 가장 먼저 일어서는 세대다. 하지만 이 당연한 지분도 분노의 충동을 억제하고 합법적으로 행사될 때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선열들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려 했던 자유와 번영, 평화의 숭고한 가치들을 계승해 유지 발전시키려면 그를 위한 수단과 방법 역시 이탈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보수를 가리켜 무조건 기존 제도를 유지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고로 공박하는 부류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보수가 그리 간단한 생각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폭넓게 틀을 갖춰 온 사상이라서 학자들도 한 마디로 개념을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현명한 보수는 기존의 질서와 제도를 존중하되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을 구현하기 위해 스스로 보완하면서 외연을 확대해 왔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위력까지 동원하며 합당한 변화를 거부하는 행위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반동에 가깝다.
시장경제 원리를 앞세운 자본주의 역시 18세기 중엽 이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본주의가 이윤 추구를 위해 자본 지배라는 기득권 키우기에 집착했더라면 망해도 벌써 여러 번 망했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기득권이라는 눈앞의 이익보다 경제적 번영과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부단히 변신했다. 경쟁과 효율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약자나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와 소득 재분배 제도를 도입, 수정자본주의의 길을 선택했다. 여기에는 물론 빈부격차 확대에 따른 정치 사회적 압력과 이념 공세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자본주의 내부에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스마트 회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근 이념적 지형 변화에 매우 민감해진 일부 보수단체들은 “합법적으로 절차를 밟아 피켓 들고 점잖게 시위에 나선들 영악한 좌파 세력이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으냐”며 충격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노인 세대들의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틀렸다고 하기도 어려운 지적이다. 하지만 보수가 걱정하며 경고 메시지를 보내야 할 대상은 이념에 투철한 급진 세력이 아니다. 기회 균등과 빈부격차 완화 등 경제 정의와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들이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설득하고 갈등의 골을 메워 주어야 한다. 지금 보수에게는 세의 과시가 아니라 젊은층을 설득할 수 있는 윤리적 명분과 현명한 전략이 필요하다.
김성기 카피리더 kimsong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