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은 칼바람에 울음을 삼킨다… 남한산성의 겨울
입력 2010-01-27 17:37
남한산성이 373년 전 그날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오르자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꽃이 떨어지고 얼어붙은 성벽은 청량산 능선을 따라 출렁거린다. 한줄기 바람과 햇살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성안과 성밖을 휩쓸고 지난다. 겨우내 쌓였던 묵은 눈이 스러지자 성벽에 각인된 시간의 무늬가 나이테처럼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그해 겨울, 남한산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청나라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1636년 12월 14일(음력) 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조정은 성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0일에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을 나와 강물이 풀리기 시작한 삼전도에서 청에 투항한다.
47일 동안 생(生)과 사(死)가 뒤엉켜 싸웠던 남한산성은 위기 때마다 국방의 보루 역할을 한 역사의 현장이다. 산이 울창하고 계곡이 아름다워 사철 산행객들로 붐비는 남한산성은 신라의 주장성을 기초로 축성된 ‘천작지성(天作之城)’. 해발 5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8㎞가 넘는 성벽이 둘러싸 대군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요새였다.
남한산성의 정문은 인조를 맞았던 남문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하지만 ‘하늘이 쌓은 성’은 어이없게도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일제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됐다. 성문 앞에는 수령 35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성벽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영욕의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
돌로 쌓은 성벽은 주변의 지형대로 등고선을 그린다. 남문에서 성벽 아래 순찰로를 따라 동쪽 산등성이에 오르면 일직선을 그리는 성벽 사이로 3개의 옹성이 위엄을 자랑한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옹성은 성문이나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로 남한산성에는 5개가 축성되었다.
성벽을 경계로 성안과 성밖의 풍경은 다르지만 분위기는 성안과 성밖이 다르지 않다. 성밖 설산은 푸른 하늘 아래서 더욱 하얗게 빛나고, 성안 설산은 푸른 하늘 아래서 더욱 푸르게 빛난다. 이따금 새가 성 안팎의 가지를 옮겨 다닐 때마다 흩날리는 눈가루가 이 숲 저 숲에서 황홀한 무지개를 그린다.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동문이 보일 때쯤 성벽은 가파른 내리막을 달린다. 눈 덮인 성벽 순찰로에 새겨진 산행객들의 발자국이 청군에 쫓기는 조선 병사들의 발자국처럼 어지럽다. 사각형의 총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다 못해 포탄과 화살이 교차하던 그날의 하늘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동문에서 다시 가파른 능선을 오른 성벽은 장경사와 장경사산지옹성을 거쳐 동장대 터에 이를 때까지 힘겹게 산을 오른다. 성밖으로는 한봉에서 벌봉까지 외성이 둘러싸고 그 너머로 설산이 중중첩첩 펼쳐지는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린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은 동장대 터.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동장대 빈터에 서면 성밖 하남시와 동장대 보다 높은 벌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병자호란 때 청의 장수 용골대는 벌봉에 진지를 구축하고 손바닥처럼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안의 별궁을 향해 화포를 쏘아댔다. 현재의 외성은 병자호란 이후에 축성됐다.
동장대 터에서 북문까지는 가파른 내리막길.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소나무 숲이 가없이 펼쳐지고 성밖의 가파른 능선에 뿌리를 내린 나목은 눈이 반쯤 얼어붙어 묘한 흑백의 조화를 이룬다. 이따금 동장대 아래의 암문을 통해 벌봉으로 오가는 산행객들의 울긋불긋한 원색차림이 하얀 도화지에 그린 수채화 같다.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웠던 유일한 전투의 현장. 영의정 김류가 지휘하는 정예병 300명은 북문을 열고 나가 청병과 대적했으나 안타깝게도 전멸했다. 하남으로 가는 북문에서 서문을 거쳐 수어장대 아래까지는 완만한 오르막. 순찰로와 이웃한 널찍한 도로는 소나무가 우거져 산책로로 이용된다.
성벽 밑이 가파른 북장대 터도 동장대 터 못지않게 전망이 좋다. 곡선과 직선을 그리는 성벽은 능선과 하늘의 경계를 따라 멀리 동장대 터를 향하다 소나무 숲 속으로 사라진다. 고개를 북동쪽으로 돌리면 무성한 나뭇가지 너머로 연주봉 옹성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너머로 하남 시가지가 펼쳐진다.
남한산성의 옹성 중 가장 아름다운 성은 하남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연주봉 옹성. 서문과 연주봉 옹성 중간에 위치한 전망대에 서면 청계산 관악산 남산 북한산 도봉산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산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는 20만 대군으로 불어난 청병들의 막사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하얗게 얼어붙은 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서문은 산세가 가팔라 청군이 쉽게 접근하기 곤란한 곳으로 송파 거여 마천 방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인조는 남한산성 칩거 47일째 되던 날에 서문을 나서 봄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한 삼전도 앞 들판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한 후 굴욕적인 강화를 맺는다.
‘삼전도의 굴욕’을 생생히 기억하는 남한산성 서문과 성문에 걸린 깃발이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칼바람에 울음을 삼키고 있다.
광주(경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