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피플-홈플러스 이승한 회장] 초고속 성장… 용기로 똘똘 뭉쳤다

입력 2010-01-27 00:48


한 여인이 편지를 썼다. 편지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보다 사랑하는 승한씨에게∼”로 시작한다. ‘꿈꾸는 청년 승한씨의 회갑에 부쳐’라는 제목과 편지 말미에 ‘사랑하는 두목님의 회갑에 오리 드림’이라는 것만 빼고 보면 영락없는 연애편지다. 보낸이는 엄정희(60·서울사이버대 교수)씨고, 받는이는 홈플러스그룹 이승한(64) 회장이다.

“오리와 함께 출장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는 부드러운 남자다. 아내에겐 결혼 생활 35년간 꾸준히 러브레터를 보낸다. 한 달에 한 차례 엽서를, 일주일에 한 번씩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건네는 다정한 남편이다.

편지에서처럼 부부가 서로의 애칭을 부른다던데? “오리와 도기입니다. 아내는 불평거리가 있을 때 입을 내밀어서 오리고, 저는 개띠니까 도기입니다. 아내가 처음엔 싫어했는데 언제부턴가 좋은가 봐요. 하하.” “도기와 오리요”라고 되묻자 그는 반박했다. “아뇨. 오리와 도기입니다. 항상 여자가 먼저입니다.”

하지만 강한 남자다. 대형 마트 점포 2개로 출발한 기업을 10년 만에 업계 2위로 성장시켰다. 26일 서울 역삼동 홈플러스 본사 회장실은 캄캄했다. 커튼이 드리워진 회장실은 책상 주위만 환했다. 이 회장은 “집중도를 높이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LED 조명 스탠드만 켜고 일한다”고 말했다. 부부애처럼 지난해 10월 e파란재단을 설립하면서 선언한 가족·이웃·환경·지역 사랑을 앞장서 실천하려는 듯했다.

날씬한 몸매. 무슨 운동을 하는지 물었다. “농구, 배구, 골프. 공 갖고 하는 건 다 즐겨요. 유도는 2단이고, 대구 계성고 시절엔 씨름 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적도 있어요.” 몸집이 큰 선수들을 어떻게 물리쳤을까? “순발력 있게 반사적으로 받아치면 됩니다.”

그럼 신세계 이마트의 상시할인책은 어떻게 받아칠 건가? 이 회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가격은 인상요인 변경 여부에 따라 정해야 합니다. (이마트 방침은) 진정성이 없어 보여요. 파워를 과시하려는 것 같아요.” 1970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한 이 회장은 신세계 슈퍼마켓사업부 소속이었던 적도 있다. “신세계가 그동안 잘해왔는데, 이번엔 무리수를 둔 것 같아요. 오래 가긴 힘들 겁니다.”

유통업계 최대 이슈는 기업형 슈퍼마켓(SSM). 이 회장은 “마트를 찾는 소비자들은 주로 중산층과 서민”이라며 “고객에게 저가 상품을 제공하는 SSM이야말로 친서민정책”이라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유통위원장, 체인스토어협회장답게 민감한 이슈에 대해 당당히 입장을 밝혔다.

자신 있게 말했다가 여론의 집중 공격을 받기도 했다. “리더는 물꼬를 트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맞는 건 맞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있어야 해요. 그게 이 시대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78년 삼성물산 런던지점장(차장)으로 부임한 뒤 인사 담당 이사에게 부부 동반 주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되자 “그럼 이사님도 별거하시죠”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부장 승진이 2년 늦어졌다. “그땐 내가 못되게 말했죠. 혈기를 이기지 못했어요. 노련하지 못했던 거죠.”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다. “평생 후회되는 일이 있어요.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키면서 아픈 아들을 무리하게 등교시켰는데….” 결혼 5년 만에 얻은 아들이 뇌염주사를 맞은 다음날 갑작스럽게 세상과 이별한 것이다. “요즘은 아픈 사람 출근하지 말라고 해요.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 회장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 얼굴 표정이 무척 씁쓸해 보였다.

88년 아내가 위암 수술을 받았다. 교회 계단 3∼4단 오르는 것도 힘겨워했다. 그럴 때마다 이 회장은 “내가 당신을 언제나 지켜줄 거야”라고 위로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지나친 햇살은 사막을 만들 뿐 (주님의) 은혜는 시련을 머금고 자란다’는 말을 되새기며 견뎠다. 아내는 이 회장을 다정한 아빠와 헌신적 남편, 성공적 경영이라는 협주곡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라고 했다. 두 사람은 시련을 겪고 극복하면서 사랑을 더 키운 것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샐러리맨으로 성공한 최고경영자(CEO)다. 하지만 ‘러브레터 보내는 남자’가 더 따뜻하게, 더 크게 다가왔다.

유병석 기자 bs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