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경애 (2) 사우디서 간호사 생활… 예배드리다 경고장
입력 2010-01-26 21:00
지금 내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듯 내 어머니도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다. 어머니의 기도는 당신의 딸이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열국’이란 말이 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머니의 기도 속에서 성장했다. 그 기도가 있었기에 지금은 세계를 다니며 수많은 부모들과 자녀교육 경험담을 나누고 있다. 솔직히 나는 잘나지도 못했다. 프로필 어디에도 눈에 띄는 이력이 없다.
1960년 경북 경주시 안강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간호대(대구 신일간호대학)를 졸업하고 81년 서울로 올라왔다. 아마 20군데 이상의 병원에 취업 지원서를 냈던 것 같다. 하지만 지방 출신이기에 늘 퇴짜만 맞았다. 아무리 성실하게 환자를 돌볼 수 있다고 해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시간을 뚫고 나가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마침 서울대학병원에서 중환자실 집중간호 교육 프로그램 연수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힘든 과정이라 신청자가 많지 않았다. 실력이라도 쌓자며 그 프로그램에 지원해 열심히 공부했다.
얼마 후 눈에 띄는 공고를 보게 됐다. 한미재단 후원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미국에 데려가 수술을 받도록 하는데, 옆에서 아이를 보살필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신청서를 냈고, 나는 심장병 어린이를 미국 뉴욕의 병원에 데려가 간호사 자격으로 최첨단 심장 수술을 보조하고 봉사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섯 살 여자 아이 민영이를 만났다.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가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마치 친딸처럼 민영이를 돌봤다. 하지만 민영이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 일을 그만두고 귀국해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선교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83년 가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초청 간호사로 가게 됐다. 그곳 왕립병원에서 일하면서 영어와 아랍어 통역을 담당했다. 또 매주 기숙사에서 비공개로 간호사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 및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회교국에서 선교를 했다며 상부에 보고가 들어갔고,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여기에서 또 걸리면 강제추방 또는 사형이라고 알려줬다. 먼 이국땅에서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날부터 병원 기숙사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휴가를 겸해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도피시켜 주신 것 같다.
이 사건은 결국 나를 헌신자로 만들었다. 요즘 집회를 다니면서 더 크게 느끼는 게 있다면 어머니의 기도는 힘이 세다는 것이다. 시골 출신의 평범한 소녀가, 잘나지도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은 내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다는 건 바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은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기도 덕분에 스무 살을 갓 넘기면서 시작된 숱한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 기도가 나를 이렇게 자녀교육 강사로서, 복음 전도자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살게 하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나는 이모님의 소개로 교회에서 아이들 아빠를 만나 84년 12월 결혼했다. 재미교포 2세였던 남편은 당시 신학대 1학년 학생이었다. 애들 아빠와 함께 이민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