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하나님-고도원 아침문화재단 이사장] 말씀실은 감동 전한다

입력 2010-01-26 18:04


나는 울지 않는 소년이었다. 아파도, 배고파도, 싸워서 코피가 나도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울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당신 역시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따금씩 아버지가 기도하면서 오열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전라북도에 17개의 교회를 개척하신 헌신된 목회자였다. 나는 기도 가운데 태어났다. 두 명의 딸을 연달아 낳은 어머니는 “아들 하나 보내주시면 당신의 종으로 키우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어린시절부터 무수히 “너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칭찬과 격려에 비례해서 반항심도 자라났다.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정해진 길이 있으며 당연히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세례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를 부르면서 내면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인생이 주님께 달려 있다는 일종이 영적 경험을 했다. 연세대 신학과에 진학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목사가 되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대학 2, 3학년에는 우등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다 교내 학보사인 연세춘추 기자를 하면서 글쟁이로서의 끼가 발동했다. 75년 연세춘추 편집장 시절에 필화사건을 겪었다. 긴급조치 9호로 수배되었고 잠시 구치소 신세를 지다가 강제징집을 당했다. 군에 들어가기 직전에 어머니를 뵈려고 시골집에 내려갔다. 어머니의 반응이 의외였다. 무너져 내리며 대성통곡하실 줄 알았는데 침착하게 “하나님이 너를 다른 방식으로 쓰기 위해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장하다”라고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제적되고 강제징집을 당함으로써 사실상 내가 목회자가 되는 길은 사라졌지만 어머니의 말은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후 나는 언론인으로 지내다 김대중 정권시절 연설담당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세상적으로 승승장구했다. 성공가도를 달린다는 말을 들었다. 청와대 생활은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연설문에 들어갈 단어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5년 동안 정식으로 휴가를 간 것은 3일에 불과했다. 토요일과 주일에도 청와대에 가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몸과 영혼은 고갈되어 갔다.

49세가 되던 해에 내 몸은 완전히 무너졌다. 목에서 등 뒤쪽으로 마비가 왔다. 정신과 몸이 완전히 다르게 놀았다. 배는 돌덩이처럼 굳었다. 안마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고 약을 달고 살았다. 그래도 열심히 연설문을 썼다. ‘이 연설문만 마감하고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약을 먹으면서 쓰고, 또 썼다. 그러나 내 육신과 정신의 댐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청와대는 인간군상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그대로 표출되는 치열한 장이다. 서로 앞에서는 웃지만 뒤로는 비수를 꽂는 일이 너무나 흔했다. 그런 치열한 세상에서 몸까지 무너졌다.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가 “고도원은 장관까지는 보장받았어”라고 말했지만 이미 세상 성공은 의미가 없었다. 내가 갑자기 이 땅을 떠났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됐다. 지금 가치를 두고 한 모든 일이 헛되게 느껴졌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 어머님이 해 주셨던 말이 기억났다. 그분은 분명히 말하셨다. “하나님이 너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 주실 거야.”

이메일 주소가 막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치유를 위해 시작한 일이 바로 지인들에게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취미와 봉사 반, 또한 그 일이 어머님이 말한 ‘다른 방식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반으로 보낸 아침편지가 기적을 이뤘다.

나는 물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반향이 일어났다. 아침편지를 쓰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치유됐다. 매일 편지글을 쓰면서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겼다. 아버님이 왜 기도하시면서 오열하셨는지를 알게 됐다. 눈물이 얼마나 치유와 에너지가 되는지를 절감하게 됐다.

지금 210여만명에게 아침편지가 배달된다. 그 짧은 편지를 읽으며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울고 웃고 꿈을 꾼다. 아프고 고통스러워 우는 것이 아니라 감동과 사랑, 용서와 감사로 울고 있다. 그 눈물 속에서 나는 우리를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어머니 서원대로 목사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목회를 하고 있다. 선교하고 있다. 바로 아침편지가 나의 목회지다. 아침편지를 쓰면서 나는 편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한다. 210만명을 끌고 나갈 에너지는 기도와 묵상을 통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지금 아침편지 문화재단에는 35명의 스태프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4월에는 충주에 조용한 쉼을 위한 센터를 연다. 단순한 세상적인 성공이 아닌 ‘꿈 너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아침편지 식구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지 않았다면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 일이었다. 하나님은 내 인생 길마다 만나 주셨다. 나를 건져주신 그 하나님은 사랑으로 가득 찬 분이셨다.

정리=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