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41)
입력 2010-01-26 09:30
타는 목에 냉수처럼 느껴지는, 사랑
라틴어로 아모르(amor)라고 하면 사랑을, 모르(mort)라고 하면 죽음을 뜻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사랑과 죽음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실제 어원적인 관계는 없지만 스탕달은 ‘서양인의 사랑은 죽음과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스토브’ 사랑입니다.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는 사랑 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재 속에 묻은 불씨와 같습니다. 스토브처럼 드러나지 않는, 구들장 같은 은밀한 사랑입니다.
서양의 사랑은 아모르이지만 우리의 그 ‘사랑’이란 말은 본래 고어로는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뜨겁게 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격렬하고 노골적인, 행동하는 그 무엇보다는 언제나 마음속에서 샘솟는 사모의 정이 우리 기질에는 더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쉬이 덥지도 않고 쉬이 식지도 않는 그 사랑이란 엄격히 말해 애(愛)라기보다는 정(情)입니다.
TV에 나와서 ‘사랑은 변하는 거야’ 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서양적인 스토브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멀리 타국에 취직해 있는 딸을 위해 봉당을 청소하지 않아도 될 나이쯤에는 내 사랑도 아모르였습니다. 스토브 같은 사랑이라는 뜻에서 내 사랑도 ‘변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정철(鄭澈)의 그 유명한 ‘사미인곡(思美人曲)’의 “반기시는 낯빛이 예와 어찌 다르신고…”를 즐겨 암송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을 오직 낯빛으로만 말하는 사랑 말입니다. 이런 사랑은 애인이 끝나도 사랑은 끝나지 않습니다. 되레 애인이 사라진 후부터 사랑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부모의 자식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사랑>입니다.
사랑(아모르)을 잃은 가슴은 죽음(모르)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은 언제나 죽음을 직면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내 나이 그만할 때는 나도 변하는 사랑, 죽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쉰 살을 지난 내 사랑은 생각하는 사랑, 부재의 연정(不在 의 戀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이제야 타는 목에 냉수처럼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