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희망, 强小기업 - (32) 선일금고제작] 금고를 장식품처럼… 편견을 깼다

입력 2010-01-24 18:48


“이게 금고라고요? 정말요?”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서도 계속 물어보게 된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이 금고와 닮은 점은 육면체 모양이란 게 전부다. 전면을 장식한 클림트 그림, 보석으로 된 무늬는 요즘 유행하는 와인 냉장고나 에어컨 디자인과 비슷하다. 예쁜 탁자 같기도 하고 고급 호텔에서 쓰는 작은 냉장고 같기도 하다.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육중한 두께의 벽면과 굵은 쇳덩이로 된 잠김쇠를 확인하고서야 이 물건이 금고임을 알 수 있었다.

선일금고제작의 야심작 ‘루셀’은 금고가 짙은 색의 둔탁한 금속덩어리일 것이란 선입견을 깼다. 24일 경기도 파주 본사에서 만난 김영숙(55) 사장은 “가정에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손색없다”고 자신했다.

선일금고제작은 업체 이름처럼 금고를 만드는 회사다. 1973년 창업 이래 지금까지 금고 한 우물을 파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금고업체로 성장했다. 화재에서 1시간 넘게 견딜 수 있는 내화금고 분야에선 2008년 세계 시장 점유율 35%로 1위인 대표적 강소기업. 지식경제부가 선정한 ‘일류상품 지정기업’이기도 하다.

이 회사의 고유브랜드 ‘이글 세이프스’는 이미 세계 100개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2004년 4월 낙산사 화재 때 각종 문화재가 불탄 자리에 선일금고의 내화금고만 멀쩡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지금이야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다이얼식 금고에서 버튼식으로 전환했던 80년 미국에 처음 수출했던 제품은 칩 문제로 문이 안 열려 모조리 반품됐다. 95년엔 수출하던 금고가 컨테이너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극심한 환경변화로 녹이 슨 탓에 반품되기도 했다. 회사는 위기를 기술 확보의 기회로 삼았고 미국안전규격 인증(UL) 등 세계 3대 인증은 물론 각국 인증을 대부분 따내는 성과를 거뒀다.

김 사장의 남편이자 창업주인 김용호 회장이 2004년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숨진 일은 회사 최대의 위기였다. 해외 바이어들이 금고 엔지니어인 김 회장 부재를 회사의 운명과 직결시켰던 것. 그동안 재무 등 관리업무만 맡았던 김 사장이 제조와 품질까지 책임져야 했다. “직원 한 명씩 모두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독수리가 부리를 깨고 발톱을 뽑는 고통을 견뎌내야 더 강한 부리, 발톱으로 새롭게 태어나듯 혁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금고업계가 변화가 거의 없는 보수적인 업종이기 때문에 혁신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이 통했던지 김 사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회사는 더 성장했다. 2006년 1000만 달러 수출탑도 탔다.

특히 대학에서 제어계측공학을 전공한 뒤 제조 전반을 담당하고 있는 첫째 딸 김은영(33) 상무, 경영학을 전공하고 김 사장의 경영을 돕는 작은 딸 김태은(31) 차장이 김 사장에게 큰 힘이 됐다. 두 딸은 회사 혁신에 선봉장 역할을 해냈다.

김 사장은 “딸들 없었으면 회사 꾸려가는 데 난관이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큰딸이 회사일로 늦게 퇴근하거나 밤을 꼬박 지새울 때가 많았어요. 큰딸 아이들이 이제 5세, 3세 둘인데 손자들이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제대로 먹은 적이 없어 얼굴이 퀭했을 땐 정말 가슴 아팠어요.” 가족 얘기를 하는 김 사장 눈가가 살짝 붉어진다.

김 사장은 여성적 감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에도 적극적이다. 김 사장은 가게를 개업한 친구들에게 금고를 선물로 주곤 했는데 다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기능이 아닌 생김새가 문제였던 것. 이에 김 사장은 누구나 갖고 싶을 정도로 예쁜 금고를 만들어보자고 나섰다. 약 2년간 노력을 들여 지난해 탄생시킨 신제품이 바로 루셀이다. 튼튼하기만 하면 충분하던 금고에 ‘나만의 보석상자’란 개념을 도입, 굳이 돈이나 값비싼 패물이 아니라도 일기장이나 사진 등 개개인의 소중한 추억거리를 보관하는 가정용 소품으로 탈바꿈시켰다. 당연히 실내 장식품으로서도 가치 있도록 디자인에 신경 썼다. 금고업체로선 이례적으로 현재 강남 일대 백화점에 입점했다.

올해 목표는 루셀을 본격적으로 해외시장에 선보이는 것이다. 김 사장은 “루셀 외에 신제품 내화금고도 출시해 세계 시장 점유율을 40%까지 늘리겠다”고 강조했다.

파주=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