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 바로 세우자-(7) 일제하 빛났던 민족운동] 교회조직·교인동원 있었기에 3·1운동 폭발
입력 2010-01-24 19:38
한국교회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기독교는 초기부터 민족운동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는 무관했다. 오히려 일본의 식민주의 침략을 봉쇄할 수 있는 대안세력으로 간주되면서 수용됐다. 대부분 선교사들을 파송한 미국의 대외정책도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에 역점을 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성도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적극적이고 주체적이었다.
1884년 고종의 선교 윤허를 통해 시작된 선교는 직접 복음 전도보다는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해 당시 조선사회가 절실히 필요했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즉, 개화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또한 철저한 복음주의 신앙을 통해 친일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성경 중심적 신앙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조선사회의 구조적인 모순들을 혁파할 뿐만 아니라 야만적인 일제의 침략에 항거할 수 있는 정신적 동력을 제공했다. 특히 당시 언문으로 폄하되었던 한글로 성경을 번역, 기독교 신앙뿐 아니라 민족의 얼과 문화를 습득할 수 있는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놓았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경적 신앙을 기반으로 자립·자치·자전하는 교회로 발전시키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교회 성장과 토착적인 자립교회를 이룩했다.
1905년부터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구국기도회를 열고 항일과 민족의식 고취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10년 조선을 강제적으로 병합하자마자 일제는 기독교 신앙이 돈독했던 서북지역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교계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일제는 간악한 고문과 협박을 통해 초대 총독 데라우치 모살미수 사건으로 날조해 선교사들을 포함한 기독교계 인사들 123명을 기소했다. 하지만 반인륜적이고 잔인한 고문행위가 선교사들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자 일제는 사건의 허구성을 인정하고 서둘러 매듭짓고 말았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일부 인사들은 3·1 독립운동과 연결돼 일제치하에서 민족운동 활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독립협회의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서재필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해 김종섭 한석진 방기창 등도 기독교인이었다. 한석진 방기창은 한국 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에 포함됐다. 3·1 독립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터졌던 민족운동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전국 조직망을 통한 의사소통과 연락, 그리고 교인과 학생들의 동원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3·1 운동에서 기독교가 감당한 역할은 운동 관련 기소 피고인과 수감자의 종교 분포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기독교는 구한말과 일제하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이상과 함께 운동 이념으로도 작용했다. 민족 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계 인사들이었다. 운동의 발단 및 전개에 한국교회는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같은 기독인들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에 대한 일제의 대응은 대표적으로 경기도 화성군에 소재한 제암리교회를 방화함으로써 신자 30여명을 천인공로할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으로 표출됐다.
일제가 우리 민족과 교회에 강요한 신사참배는 황국신민화를 통해 침략전쟁을 완수하기 위한 정치종교적인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의미는 신앙적 차원뿐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할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 한국 내 존재하고 있었던 많은 종교단체들은 일제의 저의를 간파하지 못한 채 거의 다 굴복했다. 그러나 기독교계 인사들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으로 신사참배가 지니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인식하고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반대운동을 이끌어갔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민족의식을 지켜냄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훤히 열어 나갔다. 당시 교회는 실로 민족 희망의 전원(電源)이었다.
역사는 공정하고 진실한 눈으로 기록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역사 왜곡이 주변국의 역사가들뿐 아니라 한국 내 편향된 시각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서도 자행되고 있는 현실은 반드시 극복돼야 마땅하다. 그래야 올바른 역사인식을 후대에 계승시킴으로써 교회와 민족의 미래가 환하게 열릴 것이다.
박응규 아세아연합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