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노석철] 성조기 판결

입력 2010-01-24 19:19

미국 연방대법원은 1989년 상식을 깨는 판결 하나를 내놨다. 성조기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그레고리 존슨 사건에서, 그를 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공산주의 혁명가를 자처한 존슨은 1984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시위를 벌이다 성조기를 불태운 혐의로 기소됐다. 판결문을 작성한 83세의 브레난 대법관은 “대법원의 결정은 성조기가 상징하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고, 존슨 같은 사람도 관용하는 것이 미국 사회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존슨을 처벌하는 것은 성조기의 신성함을 지키는 게 아니라 성조기가 상징하는 고귀한 자유를 희석시킬 뿐이라고도 했다. 당시 공화당뿐 아니라 진보적인 민주당조차 판결에 반발했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판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계속되자 연방의회는 성조기보호법을 제정했으나 대법원은 이 역시 위헌이라고 재차 선언했다. 결국 얼마 후 여론은 잠잠해졌고,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인종차별 해소와 인권 보호에 앞장섰던 얼 워런 대법원장은 1953년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워런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으로 보수 성향의 인물이었으나 예상을 뒤엎고 진보적인 판결을 적극 주도해 나갔다.

1954년 연방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 학생을 함께 공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주도로 불붙은 흑인 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미국 일부 주에서는 버스 좌석도 흑인과 백인석이 분리돼 있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당연시됐었다. 보수적인 백인들 입장에서 기득권의 근간을 흔들고,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판결이었던 셈이다.

또 수사권 남용에 제동을 건 ‘미란다 원칙’도 워런 대법원장 재임 기간에 나왔다. 아이젠하워는 워런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게 대통령 재직 시절 최대 실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보수기득권층의 기반을 뒤흔드는 판결이 나오거나, 태극기를 태워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극렬주의자를 법원이 옹호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최근 잇따른 ‘편향판결’ 논란으로 이용훈 대법원장 차량이 계란을 맞고, 판사가 신변보호 요청을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우리 법원이 정치적·이념적으로 경도된 건지, 아니면 워런처럼 시대의 변화를 꿰뚫고 권위를 세우는 과정인지 훗날 역사의 평가가 궁금하다.

노석철 기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