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우울증’ 아시나요… “겉은 웃지만 속은 곪고 타들어가요”
입력 2010-01-24 17:31
인기 연예인 김나영씨가 진단받은 ‘가면 우울증’이란 병명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김씨는 방송에서 늘 밝고 쾌활한 모습만을 보여줘 우울증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기 때문에 네티즌들의 놀라움과 궁금증이 더 컸다. 하지만 정신과 전문의들은 김씨처럼 항상 웃는 표정의 유명 연예인이나 스튜어디스,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고객의 기분을 맞춰야 하는 서비스 종사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회 봉사자 등은 자신도 모르게 생길 수 있는 병이라고 얘기한다.
백화점 여성 의류 매장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하는 이은주(27·가명)씨는 평소 명랑하고 잘 웃는다. 손님들을 상대하는 게 가끔 짜증날 때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특별히 기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한다. 출근 전 부모님께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 화가 났거나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직장에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객을 맞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없이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명치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어깨와 등도 아프고…. 특히 위장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툭하면 체하고 속이 더부룩했다.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져 내시경 검사를 받아 봤으나 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신경이 예민해 탈이 난 것 같다는 말만 들었다. 의료진 권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결과, 뜻밖에도 가면 우울증이었다.
인제의대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우종민 교수는 “우울증이라면 기분이 우울하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병이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울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가면 우울증(masked depression)’ 환자들이 최근 늘고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호탕하게 웃어도 속은 곪아서 타들어가기 때문에 ‘스마일 우울증’이라고도 불린다.
가면 우울증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는 문화에서 많이 나타난다. 자기 감정 표현에 솔직한 편인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한국, 일본 등 동양 국가에서 이런 환자가 더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우 교수는 “서비스업 비중이 높아지면서 직업상 본래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포장해야 하는 ‘감정 노동자들’이 요즘 특히 가면 우울증에 취약한 계층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우울한데, 감정 숨기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가면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하다’ ‘괴롭다’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정서적 표현이 제한되는 대신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다. 감정을 숨기다 보니 극도의 스트레스가 쌓여 몸에 각종 이상이 생기는 것. 두통이나 소화불량, 가슴이나 목에 뭐가 꽉 막히거나 걸린 느낌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우울증에 관여하는 세로토닌계 신경이 위장관에 많이 분포돼 있어 우울증이 깊어지면 위장 기능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크다. 따라서 뚜렷한 원인 없이 위장병이 생기거나 신체의 불편한 증상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우울증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 교수는 “가면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우울함이 병의 근원인 줄 모른 채 이곳저곳 아픈 곳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 다니지만 증상이 쉽게 호전되지 않고 결국 더 악화되고 우울증이 심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기 십상”이라면서 “병을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다는 것이 문제지 일단 정확히 진단만 되면 치료는 어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가면 우울증이 의심되면 우선 적절한 휴식과 함께 환경을 바꿔보자. 평상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휴식 시간을 충분히 갖고, 당분간 현재의 자신을 괴롭히는 업무에서 떠나 새로운 일이나 사람을 접하려고 시도해 본다. 연예인, 스튜어디스, 사회봉사자, 서비스업 등 직업으로 인해 가면 우울증이 생겼다면 그 직업이 정말 자신에게 맞는지 전문적인 적성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운동이나 취미,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가면 우울증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 단, 취미 생활의 경우 중독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