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500일의 썸머’… 사랑의 감정 고조-냉각 순간 섬세하게 터치

입력 2010-01-22 21:15


로맨틱 코미디는 커플을 위해 탄생한 장르다. 우연히 만나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일을 계기로 사랑에 빠지고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 커플이라면 로맨틱 코미디를 보며 “우리 사랑은 영화보다 운명적이었어”라고 손을 맞잡은 채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몇 해째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내고 “제발 애인이 생기게 해주세요”라며 간절히 기도해본 사람들에게 로맨틱 코미디는 SF보다도 실현 가능성이 적은 판타지다.

21일 개봉한 영화 ‘500일의 썸머’는 그런 면에서 로맨틱 코미디의 미답지를 개척했다. 사랑을 얘기하지만 ‘500일의 썸머’가 펼쳐보이는 사랑은 동화 속 사랑이 아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만나 맺게 되는 관계의 시작과 끝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 그 안에서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갖게 되는 처절한 권력의 위계와 사랑에 대한 각자의 환상을 영화는 때로는 냉혹하리만치 날것으로 드러낸다. 사랑의 절정에서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던 목덜미의 점이 관계가 끝나고 나면 징그러운 것으로 돌변한다. 그게, 우리가 어떤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의 고조와 냉각이다. 연애의 단맛과 쓴맛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바로 그것.

건축가를 꿈꾸지만 지금은 기념일 카드의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는 톰(조셉 고든 레빗)은 운명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믿는 로맨티스트. 그는 사장 비서로 입사한 썸머(주이 데샤넬)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모두 밴드 더 스미스를 좋아하고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좋아한다. 톰은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며 썸머가 운명의 여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썸머는 “부담스러운 관계는 싫다”며 둘의 관계를 친구로 단정 짓는다. 영화는 둘이 처음 만난 1일부터 500일까지 시간의 순서를 왔다갔다하며 진행된다. 같은 상황에서 사랑이 뜨거울 때와 식었을 때 상대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건 아픈 경험이다.

그래서 ‘500일의 썸머’는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는 문구처럼 우리 모두의 얘기가 된다. 설사 ‘500일의 톰’이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건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두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누군가를 오래 짝사랑하고, “왜 저 남자(혹은 여자)는 되는데 나는 안 돼?”라며 가슴 답답했던 적이 있는 사람에게 영화는 답을 준다. “그저 너에겐 무언가가 없었던 거야.”(‘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와 같은 뜻이다)라고. 하지만 “결국 시간은 흐르고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고,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잊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아, 난 왜 저 아무것도 아닌 말에 희망을 걸었을까”라며 자신의 무지와 맹목적인 짝사랑을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일 듯.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