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구하고 꽃다운 나이에 순직 두 해군, 48년 만에 흉상으로 꽃피다

입력 2010-01-22 21:19


22일 경남 진해 해군교육사령부에서는 48년 전 꽃다운 나이에 순직한 두 해군 장병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흉상의 주인공 고 이영우 중위(사고 당시 소위)와 고 김태원 중사(하사)는 1962년 1월 1일 인천 외항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이 중위는 25세, 김 중사는 20세였다.

당시 초계함인 낙동함에 묶여 있던 소형보트가 거센 풍랑에 줄이 끊기면서 떨어져 나갔다. 당황한 갑판병이 이를 잡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갑판병이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자 수영을 잘했던 김 중사가 몸을 던졌다. 김 중사마저 차가운 겨울바다에서 위험한 상태에 이르자 전기실장이었던 이 중위가 뒤따라 바다로 몸을 던졌다. 10여분 간의 사투 끝에 두 사람은 갑판병을 배 위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이미 힘이 빠진 이들은 배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시신은 일주일 만에 발견됐다.

정부는 이 중위와 김 중사에게 각각 금성화랑무공훈장과 은성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 조의금을 전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당시 한국함대사령부(현 해군작전사령부) 군종과장으로 장례식을 집도했던 윤종원(79·예비역 해군중령) 목사는 지난해 5월 해군본부에 이들의 흉상을 건립하자고 건의했다. 윤 목사는 매년 이들의 기일에 추모기도를 올려왔다. 해군은 윤 목사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전투상황은 아니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전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전우애는 기념할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막식에 유족은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 중위의 형 광우(74)씨는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올 수 없었다. 6·25전쟁 때 월남한 김 중사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귀연(생존 시 67세)씨는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윤 목사는 “김 중사는 여동생과 월남해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아직까지 혈육을 찾지 못해 훈장도 전하지 못하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해군교육사령관 김정두 중장 주관으로 열린 제막식에는 해군장병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중위의 흉상은 장교생활관에, 김 중사의 흉상은 갑판부사관이 교육받는 제승관에 세워졌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