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주은] 안개 낀 연못이라야
입력 2010-01-21 18:07
지난주엔 학제간연구라는 근사한 명목 하에 하프시코드 연주자 댁을 방문하여, 피아노의 전신으로만 알고 있었던 하프시코드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연주자가 대략의 악보를 보면서 아주 풍부한 연주를 해줄 때였다. 분명 오선 위에는 음표의 길이나 박자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콩나물머리만 대충 그려져 있었다. “악보가 왜 이리 허술한 거죠?” 하고 여쭈어보니, “이건 연주자의 좋은 취향에 의존하는 곡이에요. 느낌으로 연주하라고 그렇게만 제시한 거예요”라고 대답해주셨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어떤 실내악곡을 듣다가 스쳐 지나가는 몇 개의 선율 혹은 화음에 갑자기 황홀감을 느낀다. 실체가 무엇인지, 순식간에 자신을 덮친 기분 좋은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 채 그는 그 느낌을 다시 한번 떠올리려고 집중해 본다. 하지만 그 순간은 결코 설명할 길 없는 그저 경험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취향이란 바로 그런 불가해한 미적 경험들이 쌓여서 습득되는 것으로, 쉽게 가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좋고 싫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호라고 해야 정확하다. 취향은 미적인 내공을 쌓은 자, 즉 오랜 세월 축적해온 안목과 미적 방향성과 애착이 있는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취향에는 자연스럽게 ‘귀족적’이라는 의미가 따라붙나 보다.
귀족 흉내를 내다가 엉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미스터 빈이 생각난다. 레스토랑에 간 미스터 빈은 생굴을 못 먹는데도 주방장이 권하니까 주문하여 억지로 먹다가 몰래 남의 핸드백 안에 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그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발견하는데, 그냥 덥석 줍지 못하고, 괜히 품위를 유지하겠다고 바닥에 냅킨도 떨어뜨려 보고 그래도 돈이 손에 안 닿으면 물도 쏟아 보고, 점점 일을 크게 만든다.
사실 이런 행동은 귀족적인 것이 아니라, 귀족 흉내를 내는 것이다. 취향 없이 형식만 외운 이들의 특징은 약간만 원칙에서 벗어나도 당황하여 실수를 숨기려고 진땀을 뺀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미스터 빈처럼 그럴 듯해 보이는 데 전력을 집중하기 때문에 그 무엇 하나 진정으로 즐기지 못한다. 진짜 귀족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맛, 음미할 수 없는 맛이라면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귀족 흉내 내기를 비웃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오래도록 귀족들이 취향을 이끌어왔고, 결국 예술이란 그들이 키워낸 환상 속에서 싹트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아우라를 완전히 걷어내 버리고 오로지 실체가 확실한 것만 중시하는 사회라면 예술은 기를 펴기 어렵다. 연못에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어야 용이라도 숨어 있을 여지가 생기는 것 아닐까? 안개 없는 연못에선 도롱뇽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주은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