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동수] 목적이 이끄는 인생 후반전
입력 2010-01-21 18:19
“은퇴는 여가의 시작이 아니라 가치있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축복의 시기다”
몇 년 전 명예 퇴직을 한 지인이 있다. 그는 연봉 8000만원 이상을 받던 유수 기업 간부였다. 그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말렸다. 당시 40대 후반이던 그는 정년도 많이 남아있었다. 회사 내에서 흔들리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나이를 먹으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며 사표를 냈다. 때마침 회사 측이 실시한 명예퇴직 프로그램은 그의 결정을 재촉했다.
2년치 월급의 명퇴금을 쥔 그는 오피스텔을 얻어 1인 기업을 시작했다. 다니던 회사 업무와 연관된 비즈니스라 큰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창업 초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예상 못한 변수에 고전했고 뜻하지 않은 시행착오에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어렵사리 난관을 헤쳐온 그의 사업은 이제 안정적이다. 자신만의 ‘니치’를 찾았고 수익 모델을 구축했다. 아직 회사 재직 때보다 많은 수입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그는 만족해한다. 하루 24시간을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데다 중병만 없다면 퇴직 걱정 없이 하고 싶을 때까지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년을 앞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가 인생 이모작에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은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닐 때부터 그는 평생 영위할 일을 꿈꿨다. 구체적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회사 업무를 통해 구축된 휴먼 네트워크를 잘 관리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관련 지식을 축적했다. 철저한 리스크 관리도 사업의 안착을 도왔다. 그는 퇴직금을 사업에 올인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웬만한 업무는 직접 처리하고 아웃소싱을 적절히 활용했다. 생활비도 크게 줄여 ‘짠돌이’ 생활을 체질화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흔치 않은 사례다. 회사를 다니는 대부분의 중장년층은 별다른 준비 없이 정년을 맞게 된다. 연초부터 베이비 부머들의 정년연장 문제가 사회적 어젠다가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 인구의 14.6%를 점하는 베이비 부머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신체적으로 가장 활동적이며 교육을 잘 받은 은퇴자들이 될 것이다.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은퇴를 연기하고 더 일하고 싶어한다. 이들의 의욕과 경험, 재능을 더 활용하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정년 연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마음가짐과 준비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년 연장이 이뤄져도 언젠가는 은퇴를 해야 한다. 은퇴 후의 단계는 20∼30년이 지속된다. 은퇴 이후의 삶을 사려 깊게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준비 없는 은퇴는 ‘자기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이전에 직장에서 가졌던 역할을 더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침체에 빠지고 가장으로서, 친구로서, 나아가 사회적 자아로서의 정체감에 위기가 오는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직장에 의한 자기 정체감이 강한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려면 은퇴 후에 의미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냥 여가 중심의 삶으로만 보내기엔 남은 생이 너무 길다. 듀크대 정신의학박사 헤럴드 코닉은 “은퇴 이후 가장 위험한 삶은 사회나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한다는 생각 없이 그냥 무료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자가 사회와 분리돼 자기 중심의 소비적 여가에만 치중하고 비활동적으로 살면 큰 퇴행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 후반전은 하기에 따라선 해방감을 누리고 자아실현을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노인문제 전문가들은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위해 은퇴는 여가의 시작이란 생각을 버릴 것, 나이에 주눅 들지 말 것, 낡은 사고와 작별할 것,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을 할 것, 끊임없이 배우고 유연한 사고를 만들어 갈 것 등을 권고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퇴 후 생활에 대한 목적과 방향 감각을 분명하게 잡는 일이다. 목적 없는 은퇴 생활은 정신적 스트레스나 공허감, 사회적 고립감, 무용감(無用感)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다. 목적은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하는 동력이요 엔진이다. 목적을 붙들고, 목적에 이끌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과 자원을 활용할 때 은퇴는 만족스런 인생 2막이 될 것이다.
박동수논설위원 d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