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무기 삼아 날마다 ‘나홀로 전투’
입력 2010-01-21 17:38
국선 변호인 김광순
2주간 동행 취재… 두 이야기 중, 첫 번째
신경전이 시작됐다. 상대는 완고해 보이는 58세 남성 사업가.
“자료는 그냥 내가 제출할게요.” 사업가가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컴퓨터로 자료를 정리하던 33세 김광순 변호사 목소리가 높아진다. “막무가내로 증거를 내시면 재판부가 헷갈려합니다. 저한테 주세요.”
사업가는 물러서지 않았다. “써놓은 답변서 좀 봅시다.” 김 변호사가 받아넘긴다. “1심은 사기 혐의 두 가지가 모두 무죄였는데 검찰이 이번엔 부동산 담보 부분으로 쟁점을 좁혀 왔어요. 여기 답변서 초고부터 보세요. 내일 재판부에 낼 겁니다.”
기싸움에서 이겼다. 사업가 표정이 누그러지며 “변호사님 존함도 모르니 명함 한 장 주세요”라고 한다. 부동산 임대업자인 그는 재건축 사기 혐의로 기소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1심 때는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항소심까지 맡기기엔 돈이 부족했다.
김 변호사는 국선변호인이다. 19일 저녁 서울 서초동 국선변호인 법률사무소 ‘프로보노’에서 진행된 이 대화는 일종의 ‘테스트’였다. 김 변호사는 “내가 대충 공소장만 읽었는지, 사건을 파악했는지 알아보려고 답변서를 보자 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잘 나가던 로펌 변호사 생활을 접고 지난해 3월부터 서울고법 소속 국선변호인 업무를 시작했다. 1주일에 나흘은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로 점심을, 3000원짜리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운다. 매달 새 항소심 사건 20여건이 배정되고, 하루 평균 5000쪽 안팎의 기록을 본다.
그와 2주간 함께 지내보기로 했다. 18일부터 젊은 국선변호인의 잰걸음을 쫓아다니며 든 생각. 이건 기록과의 전쟁, 시간과의 사투다.
유일한 조수, 기록
무려 8시간 만이었다. 동행 첫날 김 변호사는 오후 6시가 다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고법 형사과에서 담당 사건 3건의 수사·공판 기록 2000쪽을 검토한 뒤다. 세 번씩 훑고 메모를 했다.
“그래도 오늘은 책이 3권밖에 안 되네요.” ‘책’은 두꺼운 사건 기록에 구멍을 내 노끈으로 묶은 기록집을 일컫는다. 1권이 보통 500∼700쪽. 지난해 조직폭력단 사건 때는 ‘책’ 28권을 읽었다.
이날 가장 머리 아픈 사건은 강간치상. 전직 프로야구 선수가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성을 성폭행하려 한 혐의로 기소됐다. 수원지법은 이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다뤘다.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했고 검찰은 항소했다.
무죄 사건 항소심에서 검찰은 독해진다. 완벽한 방어막을 구축해야 검사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무능한 국선변호인 때문에 사건이 뒤집혔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충분한 인력을 동원해 수사한 검사의 논리를 국선변호인은 홀로 감당해야 한다. 조력자라곤 산더미처럼 쌓인 기록뿐이다. ‘책’을 들추던 김 변호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경찰, 검찰, 1심에서 피해자 진술에 세밀한 차이가 있네요….”
다음은 1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된 살인사건. 지난해 10월 87세 노인이 81세 부인을 목 졸라 살해했다. 부인이 음식에 독을 탄 것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노인은 우울증과 수면장애가 있었고, 범행 직후 치매 진단을 받았다.
이 사건은 김 변호사가 공격, 검찰이 수비다.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한 터라 검찰 논리를 뚫고 선처를 이끌어내야 한다.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범행 직후 자수, 전문의 치매 소견, 이미 4개월 구속 상태, 고령과 지병….’ 마지막 줄은 ‘자녀 탄원서 다시 준비. 치매병원에 피고인 입원시킬 여력 입증하는 통장 사본’이라고 돼 있었다.
김 변호사는 2007년 1월 사법연수원(36기·사시 46회)을 수료하고 7월 법무법인 렉스(현 에이팩스)에 입사했다. 이듬해 12월 대법원 국선변호인 신규 모집에 지원했다. 렉스 대표는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다.
-로펌 변호사는 선망의 대상인데, 왜죠?
“공익에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형사사건 전문성을 갖추고도 싶었죠. 내성적이라 혼자 일하는 게 편하기도 해요. 수입은 (로펌보다) 좀 적지만 국선변호인 처우도 많이 좋아졌어요.”
-대부분 강도 강간 살인 등 흉악범 사건인데 고민은 없나요.
“피해자 가족이 ‘저런 놈 왜 변호하느냐’면서 멱살도 잡고, 울기도 하세요. 인간적으로 고민되죠. 끝까지 반성 안 하는 범죄자들을 보면 심란해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돈 없어 변호 받지 못하는 사람을 누군가는 도와야 하잖아요. 만에 하나라도 억울한 사람은 생기지 않아야죠.”
시간과의 사투
20일 오전 8시. 김 변호사가 평소보다 일찍 법원으로 향했다. 다음 주 재판을 앞둔 피고인이 증거라면서 무려 50여개 물품을 재판부에 우편으로 제출했다. 목록도 없이 ‘증거폭탄’을 맞은 서울고법 형사과 직원이 “정리 좀 해 달라”고 했다.
“구치소에도 가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정리하려면 3시간은 걸리겠는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김 변호사는 사무실에서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의 접견신청 허가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허가서에는 7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울구치소 오후 1시10분 3명, 1시30분 3명, 안양교도소 오후 4시 1명. 피고인들을 동시에 만나진 않을 텐데, 이상했다. “수감자들이 한 명씩 접견실 오가는 시간을 아끼려는 거죠. 한꺼번에 오면 한 명 끝나고 바로 다음 사람 접견할 수 있어요.”
정오쯤 지하철로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 갔다. 2시간 만에 김 변호사가 접견실에서 나왔다. “강도강간 피고인이 법률적으로 절도나 강제추행 아니냐고 해서…. 상담하느라 길어졌어요.”
곧바로 마을버스 타고 인덕원역 앞으로 가서 안양교도소행 버스에 올랐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하얀 선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삼거리도 대각선으로 질러가지 않고 꼭 인도를 따라 ㄱ자로 꺾는다.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뚜벅이’다.
-외부 일정도 많은데 차가 필요하지 않나요?
“운동할 시간이 없어요. 대중교통 이용하면 운동 되고 좋죠. 차보다 집을 먼저 사고 싶어요.”
안양교도소에서 청소년 강간 피고인을 만나고 나온 그의 표정이 어둡다. “진술을 번복하겠답니다.” 항소심 첫 공판까지 줄곧 죄를 인정하던 피고인이 갑자기 무죄를 주장하겠다고 한다. 다음 접견 때 다시 상의키로 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시간은 오후 7시. 역시 저녁은 도시락이다. 갑자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바뀐 연락처를 안 가르쳐 주는데 어떡하죠?”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흘러나왔다. 폭행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며 연락을 끊어버렸다는 피고인 전화다. 김 변호사는 “합의금조로 1000만원 정도 공탁금 거실 수 있으세요?”라고 묻다 이내 얼굴이 어두워지며 전화를 끊었다.
“피고인이 어린데 부모님도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 같네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이날 김 변호사가 퇴근한 자정까지 이런 전화는 계속 걸려왔다. 그만큼 고민도 깊어갔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