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행 전철 개통 1년 ‘1만원 관광’ 르포… 온양온천은 오늘도 어르신 세상
입력 2010-01-21 17:49
70대 할머니 두 사람이 전철 좌석에 앉아 대화에 열중해 있다.
“며느리란 게 시에미(시어머니) 나간다는데 방문 꼭 닫고 내다볼 생각도 안 해. 못된 것. 에미(어미)가 그러니 자식 놈까지 본뜬다고.”
“왜? 손주(손자)가 할미 싫대? 잘 따랐잖아.”
“(며느리가) 손자 녀석이 내 방에서 노는 꼴을 못 봐. 애가 방에 좀 오래 앉아 있으면 쪼르르 와서 데리고 나가. 에미가 자꾸 그러니까 이젠 (손자가) 방문도 안 열어.”
여기는 온양온천역
지난 15일 오전 10시30분 수도권전철 1호선 신창행 열차 객실. 며느리 뒷담화에 몰두한 두 할머니 앞좌석에서는 60대 초반 남성이 우렁차게 연설하고 있다.
“지하철은 공짜로 굴려? 근데 여기 보라고. 다 공짜로 돌아다니는 노인네야. 이래 갖고 국가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겠냐고.” 딱히 청중도 없건만 벌써 10분째 지치지도 않는다.
오전 9시21분 서울 종로3가역을 출발해 충남 아산 신창역으로 향하는 전철의 승객 평균 연령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높아졌다. 오산과 평택 사이의 역들에서 30∼50대 남녀 6명이 차례로 내리고, 천안역에서는 40대 주부가 아이 셋을 이끌고 하차했다. 아산역에서 두 명이 더 빠져나가고 나니 기자가 탄 객실의 남은 승객 20여명 가운데 젊은 축은 20대 남녀 한 쌍과 30대 여성 한 명뿐이다. 두세 명씩 모여 앉은 할머니, 등산복 입은 할아버지 부대, 노인 부부…. 죄다 60∼80대 노인이다.
며느리·사위 흉보기, 자식 자랑에 이어 쑤시는 무릎과 최근 세상 뜬 친구의 친구 얘기까지 화제는 할머니 그룹이 단연 풍성하다. 그래도 목소리는 할아버지가 더 크다. 한 명이 목청껏 떠들면 나머지는 멋쩍어한다. 가장 조용한 건 부부 승객이다. 가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다 “멀었나” “다 왔어요” 한 마디씩 주고받고는 또 침묵이다.
“어머님 아버님, 역전 ○○탕입니다. 싸고 맛있습니다. 밥이고 탕이고 모자라면 무한정 드립니다.”
호객꾼이 나타나 음식점 전단을 나눠주기 시작하면 이제 목적지가 가깝다는 뜻이다. 여기는 전철 1호선 온양온천역이다.
노인의 나라
2008년 12월 아산시 온천동에 수도권전철이 뚫린 지 1년여. 온양온천역은 1주일에 승객 4000∼5000명이 오가는 이 일대 중심지가 됐다. 덕분에 수도권 승객의 아산 나들이는 이웃집 가듯 간편해졌다. 관광객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아산시 관광객은 1050만명으로, 2007년(833만명)에 비해 217만명이나 증가했다.
승객의 90% 이상은 60∼80대 노인이다. 역 주변은 ‘어르신 해방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노인이 넘쳐난다. 오탁균 온양온천역장은 “승객 절반은 전철 탑승료를 면제받는 노인이다. 주중에는 비율이 더 높다”고 말했다. 이들은 온천욕 후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전철 타고 집에 돌아간다.
당일치기 온천 관광객 덕에 온양온천역 역무원은 누구보다 분주해졌다. 티켓 뽑는 요령 알려주기, 전철 노선 안내, 휠체어 이동 보조 등 노인 고객은 손이 많이 갔다. 소지품 분실도 잦다. 역무원 안영숙(38)씨는 “분실물 대부분은 무임티켓 끊으려고 꺼냈다가 잃어버린 할머니 할아버지 신분증이나 목욕가방”이라고 했다.
역 주변 15개 온천탕은 10여년 만에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신천탕에는 종종 수용인원(500여명)을 넘는 손님이 몰려든다. 그럴 때면 목욕탕 앞에는 긴 줄이 선다. 한 명이 목욕을 마치면 기다리던 한 명이 들어간다. 중소형 온천탕도 전철 개통 후 손님이 크게 늘었다. 20∼30%, 50% 이상 등 고객 증가폭은 조금씩 달랐지만.
식당 매출도 상승세다. 역 앞에서 파이팅동태탕을 운영하는 조금학(44)씨는 “전철 개통되고 노인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손님 거의 전부가 어르신”이라며 “까다롭긴 하지만 소중한 고객”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온천 고객은 주머니 사정에 따라 분화됐다. 지갑이 두둑한 이들은 경로우대가 없어 온천 입장료 5000원을 다 내야 하는 P·G호텔에 간다. 깨끗하고 손님이 많지 않은 게 장점이다. 가장 대중적인 곳은 경로우대로 1000원을 할인받는 4000원짜리 온천탕이다. 시설이 낡은 곳은 저가 전략으로 고객을 유치한다. 노인에게는 정상가의 절반에 불과한 2500∼3000원만 받는다. 1000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고 온 노인에게는 이런 곳이 인기다.
한 택시 기사는 “드물긴 하지만 돈 좀 있어 보이는 어르신은 택시 타고 조용한 도고온천이나 아산스파비스로 간다”고 귀띔했다.
1만원 관광객
15일 오후 6시30분 온천동 상설시장 입구에서 만난 한 노점상. 온천 관광객 덕에 수입이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묻자 “일대가 양로원이 됐다”며 화를 냈다.
“노인네들은 가격만 묻고 절대 안 사가요. 힘들고 짜증스럽기만 해. 1500원짜리 찐 옥수수를 500원어치만 달라질 않나, 이런 거(매대에 놓인 전병을 가리키며) 공짜로 달라질 않나.”
인근 빵집 주인도 “침 뱉고 휴지 버리고 분위기만 흐린다. 진짜 돈 쓸 가족 단위 여행객이 더 안 오는 것 같다”며 “전철 생기고 매출이 줄었으면 줄었지 늘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전철 개통 후 20대 고객은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온양온천역에서 버스로 환승해 등하교하던 인근 순천향대(아산시 신창면) 학생들이 지금은 전철에서 내리지 않고 신창역으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약국과 옷가게, 시계방, 식료품점, 건어물상 등의 주인들도 반응은 엇비슷했다. 많은 이들이 “서울 노인네는 나와 상관없는 손님”이라며 시큰둥했다. ‘1만원 관광객’이란 말도 자주 했다. ‘요금이 면제되는 전철 타고 와서 3000∼4000원짜리 온천욕 하고, 4000∼5000원짜리 소머리국밥을 먹고, 시장 좌판을 구경하다 전철 타고 돌아가는 돈 없는 손님들’이라는 비아냥이었다.
노인 고객이 비품을 집어가고 예절을 지키지 않아 온천탕이 불결해졌다는 불만도 있었다. 신천탕의 한 직원은 “수건이나 비누, 컵 같은 물건이 많이 없어진다”고 했다. 고객이 고령이다 보니 안전사고도 많다. 정수온천탕 직원 김미겸(43)씨는 “노인들은 미끄러지거나 쓰러질 우려가 높아 늘 초긴장 상태”라며 “우황청심환까지 준비해뒀다”고 말했다.
온천을 빼면 관광 자체는 침체라는 점도 아산시의 고민이다. 징후는 곳곳에 있다. 지역 명소를 도는 아산시 시티투어에 대한 노인 이용객 반응은 냉담했다. 통계를 보면 주요 관광지 입장객은 되레 줄었다. 2005년 91만2000명이던 현충사 입장객은 지난해 48만1000명으로 절반 정도 줄었고, 온양민속박물관은 같은 기간 25만2000명에서 7만9000명으로 3분의 1 토막이 났다. 온천관광이 팽창할수록 다른 부문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얘기다. 온천은 소비에 소극적인 노년층, 명소 관광은 씀씀이가 큰 가족 단위 손님을 끌어들인다. 당연히 온천관광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찾아온 손님을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도 없던 고객이다. 아산시는 완만한 등산로를 실버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고 5일장을 여는 등 실버 관광객의 지갑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아산시 관광체육과 국승섭 관광기획팀장은 “온천이 젊은 이미지는 아니지만 그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자 자산”이라며 “실버 관광객을 포용하면서 문화 예술 콘텐츠가 풍부한 젊은 온천도시로 거듭나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아산=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