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내 입맛대로 ‘요리’ 한다

입력 2010-01-21 18:31


응용 프로그램 ‘앱’ 개발자 모임

안병욱(37)씨 옆 자리에 양주찬(27) 김인홍(27)씨가 앉아 있다. 탁자 위에 잔뜩 과자더미가 쌓여 있다.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10분이 지나자 양우람(24) 유검우(25) 이상훈(27)씨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과자를 권하자 냉큼 집어 든다. 식사를 거른 여섯 남자가 한 방에 모였다.

지난 14일 오후 7시15분 서울 삼성동 한 카페 공부방이었다.

개발 스터디

애플 마니아인 이들은 지난해 9월부터 모였다. 열풍을 몰고 온 애플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2009년 11월 28일)되기 훨씬 전이다. 이날 모임은 7번째다. 이들은 “아이폰이 출시되면 대박날 게 뻔히 보여 모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양우람씨가 발표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노트북을 탁자 끝에 놓더니 약 2m 떨어진 반대편 끝에 앉아 아이폰으로 컴퓨터를 조종한다. ‘키노트 리모트’라는 아이폰 앱(스마트폰용 소프트웨어를 뜻하는 ‘애플리케이션’의 줄임말)을 이용해서다.

스터디 주제는 ‘자동회전과 자동크기 조절’. 집중해 모니터를 쳐다보는 이들 6명 중 안병욱 이상훈씨만 빼곤 모두 대학생이다. 컴퓨터공학, 정보통신, 전자컴퓨터…. 전공 명칭은 다르지만 통칭해 ‘이공계’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 같은 말들이 두 시간 동안 오가고서야 영어공부도, 면접 대비도, 유학 준비도 아닌 ‘아이폰 앱 개발 스터디’가 끝났다.

17일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난방이 꺼진 회사 회의실에 8명이 둘러 앉아 있다. 또 다른 아이폰 앱 개발 스터디다. 참석자 모두 직장인이고 30대 중후반이 주축이다. 웹 프로그래머 송의근(가명·39)씨가 한 인터넷 카페를 통해 조직했다. “지난 10일 처음 모였어요. 현재 멤버가 12명인데 모임에 들어오려는 대기자가 20명이에요.”

발표를 맡은 온라인 게임 업체 프로그래머 김재범(33)씨는 이 스터디를 위해 55만원짜리 중고 맥북(애플사가 만든 노트북)을 구입했다. 아이폰 앱은 애플 컴퓨터로만 제작할 수 있다.

모 기업 전산실장인 스터디 멤버 김기석(가명·39)씨는 아이폰 앱 공부 모임이 2개다. 전날 참석한 스터디는 앱을 만들어 판매한 경험이 있는 프로급 개발자 모임이었다. “그 스터디에선 팀을 만들어줘요. 아이디어가 있으면 디자이너, 기획자 등을 엮어주죠. 3∼4명이 한 팀을 이뤄야 최상이거든요.”

개발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함께 공부하고 같이 만든다. 아이폰 앱 개발자들이 많이 모이는 ‘맥부기’(http://cafe.naver.com/mcbugi), ‘OSXDEV’(http://osxdev.org) 등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스터디만 벌써 10여개.

브랜드도 있다. 앱스토어(개발자가 앱을 만들어 올리면 사용자가 구매해 내려받는 온라인 공간)에서 소비자가 앱을 구매할 때는 그 개발자가 만든 다른 앱도 화면에 등장한다. 여러 개발자가 같은 개발자명을 사용하면 소비자에게 노출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런 개발자명은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돼 가고 있다.

즐기는 자

안병욱씨는 데이터베이스 관련 박사 과정을 밟다 동영상 재생 플레이어 아드레날린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2000년 12월의 일이다. 약 500만명이 다운받아 갔다.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컴퓨터에 깔린 셈이다. 그때 앱스토어 같은 시장이 있었다면 안씨 회사는 수백억원을 벌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회사는 사라졌다. “다 공짜였으니까요…그땐 그랬어요.” 그는 억울해하지 않았다. 소프트웨어가 돈을 벌지 못하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시대와 ‘불화’했던 개발자들은 무던한 월급쟁이의 삶을 살았다. 안씨는 지금 콘텐츠 전송용 네트워크 서비스 회사인 씨디네트웍스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랬던 개발자들에게 놀이터가 생겼다.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1∼2달러씩 받고 팔 수 있다. 장난삼아 만들었다가 수억원을 벌었다는 성공사례도 들린다. 그들은 잃었던 희망을 다시 품었다.

-취미예요, 부업이에요? 아니면 창업 준비인가요?

“그냥 재밌어서 합니다.”(이상훈) “호기심입니다. 대안언어로 프로그래밍하는 데 관심이 있어요.”(양주찬) “미래 대비용 무기를 준비하는 거죠.”(김인홍) “내가 만든 앱을 쓰고 싶은 소박한 욕구죠. PDA(휴대정보단말기) 쓸 때도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설치해 썼어요.”(김기석)

“장차 회사 일에 필요할 것 같고, 혹시 잘 만들면 돈을 많이 벌 수도 있고요. 한자 공부하는 게임 같은 걸 만들고 싶어요.”(송의근) “정년이 보장된 직장도 아니고, 익숙해지면 게임 디자이너인 아내와 게임을 만들어보려고요. 일종의 노후 대책이죠.”(김재범) “회사를 그만뒀어요. 승부를 걸어봐야죠.”(권승찬·가명)

이유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모두 흥미로워했다. 노력하는 자, 재능 있는 자보다 무섭다는 즐기는 자로 개발자들이 돌아왔다. 닷컴 열풍이 사그라진 지 10년 만이다.

개발자 시대

대항해 시대에 탐험가를 구하던 군주처럼 개발자 시대의 기업은 프로그래머를 찾고 있다. 인력난이다. 헤드헌터들은 분주하다. 앱 개발 공부를 갓 시작한 대학생도 여러 통의 채용의뢰서를 받았을 정도. 하지만 업체들이 구하는 기술자는 팀장급 프로그래머다.

코리아 리쿠르트 헤드헌팅 사업부 전형주 과장은 “대기업은 인력을 확보했을지 몰라도 중소기업들은 사람이 없어 난리다. 업체들이 원하는 건 경력 있는 전문가급인데 구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앱 개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곳은 강사 구하기 전쟁을 치러야 한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지식경제부 한국정보기술연구원의 앱 개발자 과정은 3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해 다음달 4기를 뽑는 직장인 반에도 수강자가 몰렸다.

하지만 경력자와 달리 초보 앱 개발자는 아직 취업 전망이 밝지 않다. 기술연구원 관계자는 “앱 개발 회사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배우러 오는 사람도 취업을 하려기보다 혼자 만들어보려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경력자를 데려가려 줄을 서지만 초보자를 키워낼 규모는 갖추지 못했다. 새로운 거대시장이 형성돼 갈 때면 으레 나타나는 풍경이다.

레드오션?

㈜모두애드는 지난 16일 앱 개발 스터디 모임 한 곳을 찾아가 브리핑을 했다. “앱스토어에 올라온 앱이 11만개가 넘습니다. 50위 안에 들지 못하면 잊혀지죠. 검색 기능도 썩 훌륭하지는 않아요. 여러분이 만든 앱이 팔리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돈과 사람이 몰리자 새로운 비즈니스도 생겨나고 있다. 모두애드는 앱을 광고해준다. 인기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통해서다. ‘개발만 하면 애플이 알아서 팔아준다’는 구호는 조만간 전설이 될지도 모른다. 마케팅 회사를 등에 업지 못한 개발자는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

새로운 수익 모델도 생겼다. 현재 애플사는 개발자에게 앱 판매수익의 70%를 준다. 수입은 이게 전부였던 개발자들에게 ‘서드파티(Third Party:단말기 제조사, 앱 개발자도 아닌 제3자란 뜻)’ 업체들이 접근했다.

이들은 개발자와 계약을 맺어 앱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아이템 판매 사이트를 구축하고, 결제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온라인 게임용 아이템 거래와 유사하다. 모두애드 최지원 대표는 “궁극적으로 모든 앱은 무료가 될 것”이라며 “부가 서비스로 이익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싸이월드가 무료 회원을 상대로 도토리를 팔아 돈을 버는 것과 같은 이치다.

10년 전 벤처 열풍 속에 수많은 닷컴사가 생겨났다가 소리 없이 스러졌다. 앱 개발 열풍은 이제 막 시작인데 안병욱씨는 “올해가 막차”라고 했다. “국내 앱 개발자가 300∼400명인데 이 숫자가 1만명을 넘어서는 순간 레드오션이 되는 겁니다. 10년 전 웹 프로그래머 키우듯 정부가 앞장서서 직업훈련 시키는 순간 모든 게 끝이죠.”

“뭘 만들고 싶냐”고 묻자 유검우씨는 “비밀”이라고 했다. 10년 만에 찾아온 개발자 시대, 비밀을 품은 이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