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마을 겨울 이야기… “기다리면, 눈 녹고 봄이 와”

입력 2010-01-21 17:43


수도가 얼고 자동차 시동도 안걸리는 고단한 일상, 절절 끓게 불 지피고 이웃과 도란도란… “도시사람들 고생해서 어쩌지”

밤에 땅이 얼어터지는 소리가 떵, 떵, 울린다. 아침이면 외양간의 누렁소가 허옇다. 체내의 수증기가 털 밖으로 나가자마자 얼어붙은 것이다. 집 창문이란 창문에는 죄다 성에가 낀다. 쇠붙이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는다. 수도꼭지가 얼고, 변기통 물이 언다. 낮에도 눈은 녹지 않는다.

산골마을에서 겨울은 혹독하고 뚜렷하다. 겁 한번 주고 슬그머니 물러나는 게 아니다. 눈과 추위로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계절을 창조해낸다. 서슬 퍼런 그 시공간 속에서 산골 사람들은 얌전히 동면에 든다.

산골에 겨울은 빨리 찾아든다. 추수가 끝나면 곧바로 월동준비 시작이다. 마당 높이 장작이 쌓일 때쯤 첫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눈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제설차도 오지 않는다. 사람이 다니는 길만 겨우 열어 놓는다. 눈 위로 계속 눈이 쌓인다. 눈의 높이만큼 겨울이 깊어진다.

곰배령, 아침가리, 진동계곡 등을 품고 있는 진동리(강원도 인제군 기린면)는 강원도에서도 이름난 오지다. 눈이 많기로 유명해 예부터 ‘설피마을’로 불렸다. 설피는 발이 눈밭에 빠지지 않도록 널찍하게 만든 덧신.

지난 14일 찾아간 진동리에는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다. 자동차 다니는 길에도 눈이 그대로, 지붕 위에도 눈이 그대로, 온 세상이 하얗다.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상우(70)씨는 “지난 번 눈에 장독대가 잠겼다”며 “겨우내 눈이 쌓이면 처마 밑까지 온다”고 말했다.

겨울의 낮은 노루 꼬리만큼이나 짧다. 오후 5시가 넘으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야 한다. 저녁 6시30분이면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검푸른 어둠은 아침 7시나 돼야 물러선다.

진동리에서 농사짓는 임봉수(57)씨는 밤 10시쯤 화목(火木) 보일러에 장작을 가득 채운다. 새벽에 일어나 또 한 번 장작을 넣어준다. 겨울을 한 번 나는데 1t 트럭 6∼7대 분량의 장작을 땐다. 부인 용금옥(53)씨는 “나무 해야지, 물 어는가 봐야지, 눈 쓸어야지, 하우스 무너질까 신경 써야지, 겨울에는 신경 쓸 게 참 많다”고 했다.

정연리(강원도 철원군 갈말읍)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추운 동네로 꼽힌다.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민통선 마을’. 철원기상대 자동관측 장비가 관측한 지난 14일 정연리 최저기온은 영하 28.1도. 전국에서 가장 낮다. 한 주 전에는 영하 30도 아래로도 내려갔다. 이날 병에 든 소주가 다 얼었다.

추워지면 동네 사람들은 자동차를 먼저 걱정한다. 아침마다 차에 시동을 거느라 동네 전체가 분주하다. 채장식(67)씨는 “영하 25도 밑으로 내려가면 웬만한 차는 시동이 안 걸린다”며 “차 때문에 고생하는 게 올 겨울 들어 벌써 세 번째”라고 말했다.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산골마을은 고립된다.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가려면 16㎞를 나가야 한다.

정연리에서 민통선 안으로 더 들어가면 중부전선 최전방 마을인 유곡리(철원군 근북면)에 닿는다. 4월이 지나야 눈이 녹는 곳이다. 철책선을 끼고 살아가는 이 동네 50가구 120여명 주민 가운데 50세 이하는 한 명도 없다. 노인들은 동네 입구 마을회관에서 겨울을 난다. 아침이면 펭귄 떼처럼 모인다. 점심을 같이 해먹고 화투 치며 시간을 보내다 저녁 무렵 흩어진다. 예년보다 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난방비 걱정하는 노인이 많다. 김진욱(70)씨는 “돈이 아까워 보일러를 안 트는 집도 있다”고 전했다.

문암마을(강원도 홍천군 내면 율전리)은 오지 중 오지다. 1980년대까지 오지 여행가들 사이에서 ‘한국의 티베트’로 불렸다는 율전리 살둔마을에서 차로 30분 더 산길을 달려야 만날 수 있다. 8가구가 부락을 이룬 문암마을에서 김용선(83) 할머니 집은 혼자 뚝 떨어져 산 위로 붙었다. 눈이 오면 4륜 구동 차로도 오를 수 없다. 차를 세워놓고 20분쯤 등산을 해야 한다. 오가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김 할머니는 월동준비에 대해 묻자 “산골이니까 낭구(나무) 많이 해서 방바닥 뜨끈뜨끈하면 되지”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주시용(87)씨와 사는 할머니 집은 100년이 훨씬 넘었다는 흙집이다. 산골마을엔 노인이 많고, 노인이 사는 집은 대개 허술하다. 노인들은 그 허술한 집에 웅크린 채 겨울을 보낸다.

첩첩산중에 틀어박혀 눈이 내리고 나면 세상과 격리되는 그 흙집에서 여든이 넘은 노부부는 농사 지은 거 가지고 먹고 산다. 옥수수, 감자, 팥, 콩, 배추 등이다. 방 귀퉁이에는 강냉이 한 봉지가 놓여 있다. 간식이다. 할머니는 솔잎차, 오가피차, 머루주 등을 만들어 두었다가 겨울에 먹는다고 했다. 수염 긴 할아버지는 방에서 주루목(심마니들이 쓰는 망태기)을 짠다.

산골마을의 긴 겨울은 4월 한식이 지나야 끝난다.

철원·인제·홍천=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사진=서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