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9) 못 먹어 생긴 폐병 고치려 공군 자원입대
입력 2010-01-21 17:56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학교를 정할 때 학비가 비교적 싼지를 우선 고민한 기억이 난다. 그만큼 미래보다는 눈앞의 생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그만뒀다. 누적된 영양부족으로 폐병에 걸린 것이다. 특히 기말고사 때 장학금을 타보겠다고 밤샘하며 공부하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친구에게 업혀 학교를 나설 때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그렇게 발버둥쳤건만 이렇게 대학 생활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학교를 휴학하고 친구들이 알아봐준 인천 한 암자의 방 한 칸에 묵게 됐다. 거기서 지낸 반년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였다. 그 전까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일말의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가는 사람을 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직업을 가질 수 있겠지’ 했다. 법관이 되겠다며 헌책방에서 법전을 구해 틈틈이 읽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는 그저 하루하루 결핵과 씨름하며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유일한 외출은 서울역 앞 병원에서 무상으로 나눠줬던 폐결핵 약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었다. 두 가지 약을 받아다 매일 수십 알씩 꾸역꾸역 삼키며 ‘그래도 이렇게 끝은 아닐 거야’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던 중 공군에 입대하게 됐다. 갑작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나로서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친구들이 말하기를 배고픈 청년들 사이에 “공군에 가면 국에 비계가 둥둥 뜬다”는 말이 돈다고 했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는 “결핵은 잘 먹어야 낫는다는데 건강을 되찾으려면 꼭 입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참으로 모순적인 생각이다. 건강해야 입대할 수 있는 공군에 건강을 되찾기 위해 입대하겠다니. 뒷문으로 넣어줄 ‘빽’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신체검사에서 폐 엑스선 검사를 받는 날, 가슴을 졸이면서도 기계가 신통찮아 결핵을 못 잡아내기만 빌었다. 결과는 정상.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계가 오죽 안 좋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에겐 스스로도 몰랐던, 하나님이라는 ‘빽’이 있었던 것이다.
공군 생활은 과연 듣던 대로였다. 끼니마다 고깃국에 매일 저녁이면 간식으로 빵도 나왔다. 미제 매트리스가 깔린 침상에서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공군 3년은 내 젊은 시절의 유일한 휴식기였다.
전역할 때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시 가난한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복학을 했지만 나이는 이미 2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언제까지 학비 벌며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하는 암담한 마음에 자퇴하고 말았다.
그 뒤 바로 작은 인력회사 사무실에 취직했지만 또 석 달 만에 그만뒀다. 당시는 월급쟁이라 해도 월급만으로 생활이 불가능했다. 내 한 몸 생계는 어찌어찌 꾸린다 해도 앞으로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갑갑한 심정이었다. 하루하루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쌓아도 언제 잘 살게 될지 모르는데 계속 바닥에서만 헤매는 것 같았다.
그때쯤이었다. 형님과 함께 어느 셋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날 처음 대면한 주인집 아주머니가 문 안쪽에서 우리를 보더니 맨발로 뛰쳐나왔다. “어머나, 어머나!”를 연발하며 우리 형제 등을 두드리며 반색을 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