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선의 동물이야기] 눈밭 위에 흰코뿔소

입력 2010-01-20 18:28


오랜만에 추위가 누그러진 지난 일요일에 흰코뿔소가 바깥나들이를 했다. 따뜻한 곳에 사는 동물이지만 우리 기후에 적응한데다가 열등까지 설치해 준 덕에 웬만한 추위에는 끄덕 없었는데, 지난 2주간은 워낙 매섭게 한파가 몰아쳤기 때문에 바깥구경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풀린 날씨 덕에 야외에 나와 눈 더미 옆에 서 있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코뿔소는 육상 동물 가운데 코끼리 다음으로 몸집이 크다. 두꺼운 피부와 자동차까지 뚫을 수 있는 단단한 뿔까지 가지고 있으니 동물의 왕 사자가 떼로 몰려와도 코뿔소를 감히 어찌하지는 못한다.

그래서인지 코뿔소는 급할 것이 없다. 육중한 몸과 단단한 다리로 서서 한두 발짝 걷다가 멈춰서고, 고개 한번 살짝 돌렸다가 다시 멈춘다. 흰코뿔소는 하루 10시간을 풀을 뜯어 먹는 완전한 초식동물이니 그저 자신이 먹을 풀만 있으면 되고 자신을 위협할 적도 없다 보니 남을 공격할 필요도, 공격당할 염려도 없다.

자신을 방어하는 특별한 기술이 없고 먹이를 사냥하는 법도 모른다. 눈은 근시여서 멀리 있는 적은 보이지 않고, 후각이나 청각도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공격이라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다가 뿔을 들이대며 탱크처럼 돌진하는 정면공격밖에 모른다. 그것도 자기 땅에 무단 침입한 다른 수컷에게 향해 보이는 시위 행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영역이 있는 수컷만이 번식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수컷 코뿔소에게 풀이 자라는 좋은 땅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수컷 코뿔소는 자기 땅에 들어온 침입자가 있는지 매일 순찰하며 경계마다에 똥을 누어 자기 땅임을 알린다.

흰코뿔소에게 있어서 똥을 누는 것은 단순한 배설 행동이 아니라 중요한 의식이다. 흰코뿔소의 똥 누는 일은 오래된 똥 사이에 자리를 잡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는 뒷발로 슬쩍 오래된 똥을 밀어내고 그 위치에 새로운 똥을 눈다. 신선한 똥이 냄새도 강하니 영역표시도 더 확실할 것이다.

코뿔소는 야생에서 적이 없으니 새끼를 많이 낳을 필요도 없어서 1년에 한두 번 짧은 기간 발정이 오고, 이때 단 한번 수컷을 받아들이며, 임신기간도 16개월이나 된다. 서울동물원에서는 97년에 새끼가 태어난 이후 아직 동생이 태어나지 않아 매년 암컷에게 발정이 오면 수컷과 합방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암컷이 수컷을 밀어내버려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올해는 자존심을 조금 낮추고 수컷을 받아들여 귀여운 새끼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배진선 서울동물원 동물운영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