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8) 시련 연속 구두닦이 경험… 훗날 소중한 사업 밑천

입력 2010-01-20 18:04


중·고교 시절 내내 나는 신문배달과 잡지팔이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이 일들은 당시 고학생의 일거리로 인식돼 있어서 교복 차림으로 해도 제지를 받지 않았다. 잡지팔이는 청량리에서 떼어온 헌 잡지들을 기차 안에서 파는 것이었는데 차장들은 교모에 경례를 올려붙이며 열차에 올라타는 잡지팔이 학생들을 보면 고갯짓을 하며 무임승차를 용인해 주곤 했다.

그런데 이런 ‘고상한’ 일만으로는 아무래도 살기가 너무나 빠듯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못 낸 학생은 시험을 치지 못하게 했다. 시험을 못 치면 학년 승급도, 졸업도 못했으므로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런 와중이니 끼니를 제대로 챙길 리 없었다. 형님과 살건 혼자 자취하건 제대로 밥을 지어 먹는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한 친구가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여름방학 때 구두닦이를 하자는 것이었다. 돈이 쏠쏠히 벌린다는 말에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다. 함께 나무판자를 구해 구두통을 짜고, 구두약을 살 때까지만 해도 그저 잘되려니 하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 당황한 것은 구두닦이를 하려면 교복을 입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교복은 내가 이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라는 유일한 증명이었다. 그렇지만 교복을 입고 구두를 닦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군들이며 돈 많은 신사들이 드나드는 다방이 몇 개 있었던 영등포역 앞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친구는 “헤이, 슈사인!” 하면서 지나가는 미군에게 달라붙어 금방 개시를 했다. 그러나 나는 엄두가 안 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구두닦이란 자진해서 오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일이 아니라 별로 구두 닦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구두 닦으세요, 네?” 하며 귀찮게 해서 “어허, 이놈 참” 하며 마지못해 따라와 닦도록 하는 일이었다. 영등포역 앞에 진을 친 소년 구두닦이들만 수십 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친구는 자기 일을 하는 중간 중간 “너, 저기 저 사람한테 붙어봐”라며 내 등을 떠밀었지만 쭈뼛거리는 사이 첫날은 결국 허탕을 쳤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며 ‘내 성격에는 도저히 안 맞는 일이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다행히 다음날부터 한 명 두 명 끌어와 구두를 닦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 번에 1달러씩 알토란같은 돈이 주머니로 들어오자 점점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굽실굽실하고 아양 떠는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경찰이 일제 단속을 나와 구두닦이 소년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구두통을 빼앗은 것이다. 소년들은 거의가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야간 학교에 다니는 조건으로 구두닦이를 허용해 주곤 했다. 그런데 그 중 우리는 이미 학생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구두통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짧은 경험은 끝이 났다. 그 이후로는 다시 신문배달과 잡지팔이 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이 일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그 전까지 장래 희망을 생각할 때 막연하지만 법관 등 안정되고 고상한 직업만 떠올렸던 나에게 “어떤 일이든 발 벗고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훗날 사업에 뛰어드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