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듣는 기업 수장들 눈빛이 빛난다
입력 2010-01-19 18:25
“세종대왕이 뛰어난 갈등조정 능력을 지닌 리더십 소유자였다는 걸 아십니까?”
강영진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입니다. 어떤 쟁점 사안이 있으면 충분한 토론을 거친 다음에 결정을 내렸던 세종대왕의 조정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라고 말했다.
아크릴가공 전문업체 손현석 한들홀딩스 사장이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권순학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상무는 강의내용을 놓칠세라 빠른 손놀림으로 강의 키워드를 메모했다.
19일 오전 8시 서울 남대문로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 국화홀.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임원 등 50여명이 강의 삼매경에 푹 빠져 있었다. 한국생산성본부가 4년째 한 달에 두 차례씩 진행 중인 ‘CEO 북클럽’ 강연회는 매번 이런 풍경이다. 이곳은 경영학과 인문학 심리학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주제의 책을 저자 직강으로 들을 수 있는 자리다. 한마디로 ‘듣는 독서’ 요약판인 셈이다. 이들은 북클럽 강의를 통해 합리적 리더십을 키운다.
이날은 ‘갈등해결의 지혜’(도서출판 일빛)를 쓴 강 교수가 강단에 섰다. 강 교수는 “갈등조정 과정의 핵심은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건설적 대립이 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대립 대상이 아닌 이슈(관심사) 자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시 논란’으로 정치권 및 지역간 갈등이 첨예한 때문인지 참석자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한 테이블에서는 “오늘 강의는 정치인들이 와서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에 폭소도 터졌지만 강의 내내 진지한 학구적 분위기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에게 CEO 북클럽은 ‘비타민’ ‘생각은행’ 또는 ‘각성제’로 통한다. 현재 5기가 진행 중인 가운데 1기 때부터 참석해온 헤드헌팅업체 이노에이치알컨설팅의 심숙경(40·여) 대표는 “짧은 시간에 저자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깊이 있게 접할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라며 “사고와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책 한권 읽을 만한 시간 내기가 여의치 않은 CEO들로서는 이곳이 ‘독서경영’의 노하우를 터득하는 실습장이나 마찬가지다.
노수철 법무법인 한중 변호사는 “북클럽은 생활이 느슨해질 때마다 긴장감을 갖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고 귀띔했다. 왜일까. 한국생산성본부 김찬희 이러닝센터장은 “상당수 CEO 모임이 인맥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지는 데 비해 북클럽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기 때문에 참석자 스스로 자극을 받는 게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2007년 8월 시작된 CEO 북클럽은 지금까지 온라인 참여자를 포함, 319명(연인원)이 수료했다. 강사로 나선 저자(또는 역자)는 34명, 북클럽에서 다뤄진 책은 56권이다. 한국생산성본부는 올 하반기부터 지방에서도 CEO 북클럽 운영을 확대할 계획이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