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우장춘 박사의 사위

입력 2010-01-19 18:07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1898∼1959) 박사는 한국근대농업의 아버지다. 그가 없었다면 해방 직후 우리는 김치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이고 오늘날 제주도의 감귤농사도 없었을 터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쌀 보리 등의 주곡 생산지로서 수탈했지만 배추 무 등 채소농사는 상대적으로 방치했다. 그 때문에 해방 직후 각지에 흩어졌던 해외 교민들이 밀려오자 한국은 식량난과 함께 소채 부족에 허덕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육종학자 우장춘을 국가적 차원에서 초청한다.

그런데 알려진 것과 달리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은 우장춘이 아니라 유전학자 기하라 히토시(木原均)다. 우 박사가 한국에 온 뒤 후배 연구자들에게 육종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해 보여준 게 와전된 것이다.

그는 1950년 내한해 십이지장궤양으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농업에 만년의 삶을 바쳤다. 그의 조국애는 아버지 우범선의 행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범선은 개화파 무관으로 일제에 협력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다가 1896년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한 그는 장남 우장춘을 얻었으나 1903년 명성황후 호위 무관 고영근에게 암살당한다.

아버지를 여읜 우장춘은 고학으로 고교를 졸업한 후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아 도쿄대학 농학부에 진학, 학자의 길을 걷는다. 이어 그는 스나가(須永) 가문의 양자가 되고 와타나베 고하루와 결혼한다. 여기서 한국과의 연은 끝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조국의 부름을 뿌리치지 않았다. 가족을 모두 일본에 두고 한국에 온 그는 죽음을 각오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1953년 어머니의 비보를 듣지만 가족에게로 달려가지 못했다. 이제 가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본 이승만 정부가 그의 출국을 막았던 탓이다.

지난 주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은 파산한 일본항공(JAL)의 CEO를 맡기로 했다. 이나모리는 구성원의 자율 경영참가와 부문별 채산관리를 축으로 하는 이른바 ‘아메바 경영’으로 교세라를 세계적인 전자부품기업으로 키운 이다. 일본기업재생기구는 주가가 7엔까지 폭락한 JAL을 살려낼 수 있는 적임자로 이나모리를 점찍은 것이다.

아나모리의 JAL 회생작업은 해방 직후 우장춘의 한국농업 살리기와 뭔가 겹쳐지는 느낌이다. 그가 우장춘의 넷째 딸 아사코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그가 장인 우장춘의 만년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