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의 음모? 소비자들 지갑 더 연다
입력 2010-01-18 21:19
‘9자의 마력.’ 유통업체들은 마진을 조금 줄인 대신 매출을 늘리고, 소비자들은 착시 효과에 흔들린다. 90원, 900원, 9000원으로 가격을 정한 상품이 넘쳐난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홈쇼핑 등 유통업체들은 ‘넘버 나인 이펙트(숫자 9의 효과)’를 적극 활용한 지 오래다. 9자 마케팅은 ‘9자의 음모’라고도 불린다. 불황일수록 더 효과적이다.
키 169.5㎝인 직장인 임모(28·여)씨는 “주변에서 키를 물어보거나 소개팅을 제안하면 169㎝라고 답한다”며 “반올림해도 되지만 여자 키가 170㎝라는 것과 169㎝라는 건 어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가격이 4만9000원이냐 5만원이냐에 따라 상품에 끌리는 느낌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손주영(29·여)씨는 대형마트만 가면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잔뜩 사고는 집에 와서 후회한다. 18일에도 신세계 이마트 서울 용산점에서 애경 ‘케라시스(800g)’ 샴푸 1개(1만900원)를 사려는 순간 같은 용량의 샴푸 3개에 700g까지 덤으로 얹어 1만6800원에 준다는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2세트를 구매했다.
싱글족 손씨에겐 1년 내내 매일 머리를 감고도 남을 양이다. 손씨는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지금 구매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것 같은 조급한 마음에 일단 사게 된다”며 “가끔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도 든다”고 말했다.
1만원과 9900원의 가격 차이는 100원. 하지만 9900원은 왠지 저렴한 느낌이 든다. 소비자들은 0이 중복될 때 상대적으로 가격이 일원화되고 획일적이라고 느끼는 반면 0에 미치지 못하는 9는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같은 효과에 착안, 지난해 외제차 업계는 신차 가격의 끝자리를 900만원대로 책정, 판매에 나섰다.
유종숙 숙명여대 홍보광고학 교수는 “9는 소비자들의 경계심을 해제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합리적 가격이란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숫자 9의 효과”라고 설명했다. 유통업체들의 홀수 가격정책은 완전, 성취, 완성 등을 뜻하는 동시에 부족, 준비, 실패를 상징하기도 하는 이중적 의미의 숫자 9를 적극 활용한 마케팅 기법인 것이다.
공급자 입장에서 10원, 100원 차이가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원가 5000원인 상품을 소비자 가격 1만원으로 100개 판매할 경우 순이익은 50만원. 반면 이 제품을 9900원에 똑같이 팔았다면 순이익은 49만5000원이다. 여기에 고객 심리를 자극한 효과로 2개 더 팔았다고 가정하면 1만원에 팔았을 때보다 수익이 증가한다. 판매량을 2% 늘리면 수익이 늘어나는 것이다. 상품당 마진을 높이기 위해 애쓰기보다 판매를 늘릴 수 있는 기제를 마련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법인 셈이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공짜로 준다는 ‘1+1 마케팅’, ‘덤 마케팅’도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기법. 공짜에 반응하는 소비자 심리를 십분 활용한 것이다. 박기완 서울대 경영학과(마케팅) 교수는 “실제로는 물건에 대한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지만 공짜로 얻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해 소비자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합리적인 인간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공짜로 얻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구매로 이어지게 하는 심리 마케팅”이라고 지적했다.
권지혜 유병석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