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승렬] 유럽연합 대통령 배출한 벨기에
입력 2010-01-18 18:42
연초 나의 이목을 집중시킨 해외뉴스가 있었다. 2010년 1월 1일 자정 브뤼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호성을 질렀다. 이들은 유럽연합(EU) 본부 앞 광장에 모여 정치공동체로 발전한 유럽연합을 축하했다. 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유럽연합의 앞날을 축복했을까.
2003년부터 유럽연합은 경제적 통합을 정치적 차원으로 심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12월 유럽연합의 ‘미니 헌법’이라 불리는 리스본 조약이 발효됐다. 유럽연합은 그야말로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향한 거보를 내디뎠다. 이 조약의 특징 중 하나가 유럽연합 대통령(유럽이사회 상임의장)의 신설이다. 유럽연합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벨기에 총리 헤르만 판 롬파위였으니 벨기에인들은 기뻤을 것이다. 더욱이 브뤼셀은 벨기에 수도이면서 동시에 유럽연합 본부(집행위원회)가 위치한 ‘통합유럽의 수도’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이런 면에서 벨기에는 유럽통합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유럽통합 최대 수혜국으로
벨기에가 누리는 혜택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유럽통합을 추진한 근본적 동기가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숙적관계의 극복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벨기에가 여기에 어떻게 연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벨기에 영토는 독일(합스부르크 제국),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 인접 국가들의 영토였다가 1830년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벨기에가 유럽 세력들의 분쟁지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벨기에는 독일어 계통인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 지역과 불어를 사용하는 왈로니 지역으로 구성돼 있다. 독립 이후 양 지역은 자기들의 언어를 공식 언어로 만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해 양 지역의 언어와 문화갈등이 지속되었다. 이 갈등은 친네덜란드 또는 친독일 성향 대 친프랑스 성향 사이의 대립으로, 더 나아가 게르만 문명 대 라틴 문명 사이의 해묵은 대립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갈등의 절정은 독일에서 나치 권력이 수립된 시기였다. 플랑드르 지역의 준파시즘 단체인 플랑드르 민족연합이 벨기에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나치 독일이 유럽 대륙 전역을 점령하자 플랑드르인들은 독일에 우호적인 데 반해 왈로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왈로니의 항독투쟁은 프랑스의 항독투쟁과 연합 전선을 형성한 반면, 플랑드르에서는 독일 친위대 별기군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대독협력파 숙청으로 플랑드르인들은 피해를 보았으며 양 지역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전후 벨기에에서 유럽통합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이것은 이런 역사적 갈등과 깊은 연관이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유럽통합이 구상되고 추진되었듯이, 벨기에 내부 지역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유럽통합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1963년 언어입법을 통해 두 지역 사이의 언어경계선이 확정되고 1993년 광범위한 지역 자치를 허용한 연방제 헌법이 수립돼 지역 갈등은 거의 해소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갈등이 유럽통합을 통해 해소되었듯이 벨기에의 지역 갈등 해소도 유럽통합에 힘입은 바 크다.
자국 내부 지역갈등도 해소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벨기에 총리 판 롬파위는 벨기에 내에 아직도 존재하는 지역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한 협상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유럽연합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의 이런 경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유럽연합 회원국들 간의 이해관계를 원만히 조정하고 대외적으로 유럽연합을 대변할 인물로서 적합하게 보였다.
2010년 새해 벽두 브뤼셀 유럽연합 본부 앞에 모인 사람들 중엔 아마도 벨기에인들이 제일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벨기에 출신이 유럽연합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기뻐했겠지만, 지난날의 지역 갈등을 해소한 유럽통합을 기억하며 새롭게 도약하는 유럽연합의 앞날을 축복했을 것이다.
김승렬(경상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