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진홍] 민주주의 취약성 드러낸 세종시 논란
입력 2010-01-18 18:16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밑거름 됐으면”
2005년 3월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이 행정도시특별법 국회 통과에 반발해 국회의원직을 내던졌다. 그는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거수기 정당’,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을 ‘들러리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4년 8개월여가 흐른 지난해 11월 비슷한 울림이 있었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 방침을 못마땅하게 여긴 친박근혜계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이 사무부총장직에서 물러나면서 “한나라당이 외부의 손에 좌우되는 허수아비 정당, 거수기 정당으로 전락했다”고 쏘아붙였다.
둘 다 틀린 지적이 아니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도이전을 공약한 이후 세종시 수정안이 만들어지기까지 정당의 역할은 미미했다. 비근한 예로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 수정 방침을 밝히고,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해 수정안을 마련한 전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여당답게 한 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8년 전 수도이전을 강행하다가 헌재의 위헌 판결에 따라 행정중심도시로 변경하기까지 보여준 열린우리당 행태도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당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대변하고 조직하며,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주체다. 정당 이 민주주의 중심이며,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이 생긴 이유다. 하지만 폭발력이 강하거나 민감한 현안이 등장하면 정당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싸움질만 할 뿐이다.
정당 얘기를 새삼스레 꺼낸 것은 한창 진행 중인 세종시 분란을 통해 우리나라의 취약한 민주주의 현주소를 재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여야 간, 정파 간의 비이성적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정당이 과연 민주주의 중심인지 하는 의문마저 든다.
한나라당 주류는 수정안이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안이라며 거수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반대편에 선 의원들 역시 거수기 범주에 속하기는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친박근혜계 의원들, 그리고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의원들 모두가 원안 고수라는 데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자세다. 양쪽 다 자신이 선(善)이며, 상대는 악(惡)이라는 투여서 합리적인 토론절차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의 극한 대치상황은 당연한 귀결이다.
되돌아보면 여야 간, 혹은 정파 간 대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보수·진보 정권을 초월해 여야 또는 정파 간 대치로 인한 정국 경색은 다반사가 돼버렸다. 지난해 말 새해 예산안 처리 문제를 놓고 여야가 티격태격한 기억이 생생한데 불과 한 달도 안 돼 세종시를 둘러싸고 정치권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지 않은가.
적대적 정치가 반복되는 것은 정당체제가 그만큼 허약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된 데에는 민주화 이후 정당에 지역주의 색채가 가미되고, 정치인들이 이념에서 완전히 탈피해 실용을 취하지 못한 점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요인을 들자면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이다. ‘포말정당’이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역대 대통령들은 대선을 전후해 자기가 속한 정당의 간판을 바꿔 달았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탄생한 한나라당이 우리나라 역대 두 번째 장수정당이라는 믿기 힘든 현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 지도부 인사에 간여하고, 공천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입법부를 ‘통법부’ 정도로 여긴 대통령도 있었다.
현 정부가 세종시 원안 수정이라는 중차대한 현안을 제기하는 방식에도 유사한 문제점이 엿보인다. 정책 결정과정에 여당을 배제시켰다. 대통령과 총리가 ‘국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을 공유한 채 불쑥 던졌다. 방향은 옳을지 몰라도 절차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다.
세종시 논란이 언제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분명치 않지만 이번 논란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