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6) 선대가 남긴 믿음유산… 신앙생활 이끌어준 밑거름
입력 2010-01-18 17:55
20대 중반에 교회학교 교사를 맡으며 내 의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 하나님의 뜻하심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우리 할아버지 대에 이미 나타나 있었다.
고향인 전북 임실군 덕치면은 지리산에 바짝 붙어 있지만 전주에서 순창을 거쳐 광주로 가는 신작로가 일제 때 마을 옆으로 뚫린 덕에 일찍 개화된 편이었다. 우리 집은 논을 꽤 가진 부자였고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 아니면 출타를 안 하셨을 만큼 앞서가는 분이었다.
서울에서 배재학당에 다니셨던 영향으로 할아버지는 기독교를 접하신 듯하다. 종교로 믿으신 것인지 신학문의 일종으로 생각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아들인 내 아버지를 구세군 사관학교에 보내 사관(목사)이 되도록 하셨다.
아버지는 같은 고향 출신인 어머니와 결혼해 20대 초반 서울 이화여고 옆의 구세군 사관학교에 함께 다니셨고 거기서 나보다 세 살 위인 형님을 낳으셨다. 사관 임직 후 경북 상주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셨는데 어떤 연유인지 내가 태어났을 때는 다시 임실에 와 계셨다. 두 분은 고향 주민들이 이질적으로 느낄 정도로 ‘신세대’이셨다고 한다. 내게 어머니는 하이힐을 신고 찍은 사진 속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내가 네 살 때쯤 동생을 낳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목회를 하시지는 않았지만 동네 문맹자들을 모아 공부를 시키는가 하면 청년회 등 활동들로 집을 비우실 때가 많았다. 아버지 방에는 책이 굉장히 많았고 테니스 라켓도 있었다.
그런 기억들 속 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책보를 메고 맨발이나 다름없이 다닐 때 가죽 책가방에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길에 나서면 마을 어른들 누구나 반겨주었고 귀한 집 자손 대접을 받았다.
그 생활은 열두 살까지였다. 혼란하던 시절에 그만큼 유복하게 자란 것도 행운이겠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 이후의 고생이 더욱 힘들었다.
전쟁 전에 일본군 노역에 끌려가셨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도리어 집에 계셨는데 9·28 수복 후 지리산 일대가 퇴각 못한 인민군의 소굴이 된 즈음에 빨치산에 붙들리셨고 반동으로 몰려 돌아가셨다.
하루아침에 ‘반동 가족’이 된 우리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소달구지에 가구며 생활집기, 책들이 가득 실린 위에 덩그러니 아버지의 테니스 라켓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멀어져간 소달구지의 영상만 뇌리에 선명히 남긴 채 내 유복한 유년 시절은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몇 달간 집안에 격리됐다. 그 때부터 우리는 ‘반동 가족’일 뿐이었다. 인민군이 어디서 끌고 온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벌여도 우리 집만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먼 친척 아주머니가 대문 안으로 슬그머니 고깃국 한 대접을 밀어 넣어주고 갔지만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 때는 ‘한동안 밥을 못 먹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군인과 경찰, 면장 등의 가족 중 청년들은 모두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한두 살만 많았어도 형님과 나는 그때 죽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고생은 1·4후퇴 때 피란을 가면서 시작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