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 무시 ‘양형기준’ 있으나마나… 권고사항일뿐 강제력 없어

입력 2010-01-17 19:19

“법과 현실 제대로 반영안돼”… 개선 시급 지적도

법원의 ‘고무줄 형량 선고’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양형기준이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일부 판사들은 양형기준이 현실과 동떨어진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들쭉날쭉한 형사사건 선고 형량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줄인다는 취지로 마련된 양형기준이 일부 판사들의 외면으로 유명무실해지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합의1부(부장판사 이현종)는 지난달 29일 특수강간 혐의로 기소된 장모군 사건 선고 공판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80시간,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 40시간을 선고했다. 친구와 함께 가출 청소년을 성폭행한 이 사건의 양형기준상 권고형량은 징역 5∼8년이었지만 최저 형량에도 훨씬 못 미치는 선고였다. 재판부는 “장군이 19세에 불과해 향후 교화 가능성이 기대되고 피해자를 위해 상당한 금액의 공탁금을 예치한 점 등을 고려해 판결했다”고 밝혔다.

반면 제주지법 형사합의2부(부장판사 박재현)는 지난해 9월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강모씨 사건 선고 공판에서 권고형량의 상한인 징역 4년 4개월을 훨씬 상회하는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강씨는 자신이 일하는 가게 주인이 종업원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는 이유로 주인을 심하게 폭행한 뒤 흉기로 찔렀다. 재판부는 “한 사람의 생명은 전 지구보다 무겁고 귀중하고 엄숙하다”며 “강씨의 범행 수단이 잔혹해 양형기준상 권고형량 범위 내에서 형을 정하는 것은 일반인의 건전한 법감정에도 반한다”고 밝혔다. 부산지법 형사합의6부(부장판사 최철환)는 취업을 하라고 훈계하는 외삼촌을 살해하고 사체를 훼손한 혐의(살인 등)로 기소된 김모씨 사건 선고 공판에서 양형기준 상한인 징역 13년을 상회하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양형기준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전국 법원은 지난해 7월부터 ‘양형기준표 권고형량’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살인, 뇌물, 성범죄, 강도, 횡령·배임, 위증, 무고 등 7개 범죄의 양형기준과 감경·가중 처벌 요인을 비교적 엄격히 설정해 속칭 ‘고무줄 형량’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양형기준 자체가 법과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형법상 아동 강간의 법정형이 ‘7년 이상 유기징역’인데 양형기준표의 권고형량은 13세 미만 여자 강간 사건의 권고형량을 징역 5∼7년으로 설정하는 등 현실 적용이 어려운 조항이 있다”며 “운영상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수정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