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애옥] 느린 삶을 예찬함

입력 2010-01-17 19:17


제자 한 명이 박사과정에 합격하였다며 찾아와 둘이서 조촐한 축하 파티를 하였다. 대학 시간강사로 첫 발을 내딛은 첫 수업 때 만난 제자인데 졸업 후 꾸준히 선생 집을 방문해주니 고마운 제자다. 마흔과 쉰 사이 중년의 제자와 선생이 마주해서 느리게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로 연극판에서 배고픈 무명배우 생활을 하다가 서른이 넘어 대학에 들어온 제자는 졸업 후 충청도에 있는 연기학원에서 꿈나무 배우 지망생들을 지금까지 가르쳐오고 있다. 매주 한 번은 경상도 땅으로 넘어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수년째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학업을 계속하고 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고 박사과정을 시작하니 선생의 마음은 그저 고맙고 대견하다.

남보다 결코 빠르지 않은 행보지만 이 느린 인내와 겸손을 통하여 최소한 자기 자신과 가족만 아는 소시민적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임을 믿는다.

그 제자의 선생 또한 마흔 넘어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 정식 교수가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이 대학 저 대학 시간강사 노릇 하였다. 자신의 연구실이 없으니 강의와 강의 사이에 깃들일 곳을 찾는 대신 무작정 캠퍼스를 거닐기도 하였고, 승용차 안에서 김밥 한 줄로 점심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교수가 된 지금 내 연구실을 강사로 나오는 네 분과 함께 쓰자고 제안할 수 있었다. 소속감 없는 시간강사 노릇을 해보지 않고 바로 교수가 되었다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연구실을 개방하진 않았을 것 같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10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제자는 자리를 못 잡은 학교 후배들을 자신의 일터로 불러 함께 일하고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맏형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 느리게 살아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천천히 가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1980년대 11평 연탄아파트에서 시작하여 따뜻한 물 마음껏 틀어 샤워할 수 있는 욕실 딸린 지금의 집에 감사한다.

‘어린왕자’ 책에 한 알만 먹으면 한 달 동안 목이 마르지 않는 획기적인 약을 발명했다고 호들갑 떠는 발명가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된다면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샘을 찾아 걷는 사이에 발견하는 인생의 하늬바람,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부대낌, 그리고 열심히 살다가도 불쑥 솟곤 하는 서러움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 아닌가. 혼자 면벽하여 얻는 도(道)보다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다소 우직스럽게 보일지라도 느리게 살아가며 얻는 도를 택하고 싶다.

혹자는 시간을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 시간의 지배자가 되고, 생각의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잡자고 하지만 조금 느린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음을 선생과 제자는 공감대로 삼는다. 엘리베이터 타는 것보다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 하지 않는가.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