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화산 폭발-태풍 피해 지역 의료봉사 현장… 재해 악순환에 삶의 의지마저 꺾여

입력 2010-01-17 19:49


1991년 6월 필리핀 마닐라 서북쪽 보틀란 지역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다. 600년 이상 휴면 상태였던 화산의 갑작스러운 폭발로 170여명이 사망하고 11만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인근 농경지가 화산재에 덮여 소출이 줄었고 화산 분출물로 강바닥이 높아져 매년 홍수가 반복됐다. 거기다 1년이면 대여섯 번씩 닥치는 태풍까지. 안 그래도 가난하던 사람들의 삶은 소용돌이처럼 아래로 아래로 꺼져들었다.

지난 10일 오전 피나투보 화산이 굽어보는 산후안 마을의 망고나무 그늘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독교 국제구호단체인 게인코리아가 의료봉사를 나선 현장이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노바디 노바디 벗츄’하며 한국 가요를 불렀다. 맨발에 지저분한 옷차림이지만 아이들의 눈은 신기하리만치 맑고 반짝였다. 진료를 받은 성인들은 절반 이상에서 고혈압과 당뇨 등 지속적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 발견됐다. 의료진은 며칠간의 약밖에 처방해주지 못하는 데 미안해했지만 그들은 밝은 웃음으로 답했다.

“이들의 삶은 꼭 새와 같아요.” 산후안 크리스천 교회 마누엘 드빌리에나(50) 목사는 대나무와 야쟈수 잎으로 얼기설기 지은 장난감 같은 집에 사는 1400여 가구, 4000여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먹을 것만 생각할 뿐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공중의 새처럼 걱정하지 말고 살라’는 성경 말씀(마 6:25∼27)대로가 아닌가? 드빌리에나 목사는 이런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닌걸요. 오랫동안 구호물자에 의존해온 사람들은 의지가 없습니다. 당장 내년 5월 우기가 오면 집 대부분이 비에 무너질 텐데도 대책이 없어요. 부모들도 내키면 아이들을 돌보고 귀찮으면 내버려 두지요. 그 가운데 죽어가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11일 의료봉사지는 역시 지난해 10월 태풍 이후 복구가 안돼 지붕뿐인 폐 공장 두 동에 대나무와 담요로 칸을 나눠 200여 가구가 생활하는 카라엘이었다. 진료 때 유독 사랑스러운 얼굴이 눈에 띄었던 에드먼드(2)를 따라가 보니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 2㎡도 안 되는 공간에서 엄마 및 두 형과 살고 있었다. 쌀은 떨어졌지만 에드먼드에게는 따로 아껴둔 쌀가루로 죽을 쑤어 먹인다는 엄마에게 “당신은 언제 마지막 식사를 했느냐”고 묻자 퀭한 눈으로 한참 허공을 응시했다.

게인코리아 최호영 대표를 비롯해 천안 사랑의메디칼의원 조현백 원장과 전인숙 간호사, 서울 선한이웃병원 정순열 재활의학과장 등 의료진, 천안 대학생선교회(CCC) 간사들, 순천향대 학생 등 총 13명으로 이뤄진 봉사단은 10∼13일 보틀란과 라구나 등 세 지역에서 700여명을 진료하고 제약회사들에 기증받아 가져간 500만원 상당의 의약품을 나눠줬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펴든 신문에는 아이티 대참사 소식이 담겨 있었다. 최 대표는 “이번 필리핀 지역에서의 경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재지변이 닥치면 그 피해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계의 구호는 물자와 성금 전달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도록 해야 온전해진다면서 최 대표는 “그럴 때 오히려 ‘오래 황폐했던 곳을 다시 쌓고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는’(사 61:4) 기적이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보틀란·라구나(필리핀)=글· 사진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