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5) 실수로 만든 원단이 ‘불티’… 위기 무사히 넘겨

입력 2010-01-17 17:34


1990년대 중반 국내 섬유업계에는 큰 위기가 닥쳤다. 외국 원단 수입이 시작돼 의류회사로의 판로가 서서히 막힌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우리 회사에는 한 사건이 있었다.

1992년쯤이었다. 원피스 감으로 면 100% 목공단을 생산했는데 표면에 반짝이는 느낌을 내려면 일종의 다리미 원리로 원단을 가열하는 롤러가 필요했다. 하도급 공장으로 하여금 이 롤러를 일본에서 수입하도록 해서 7만m의 원단을 생산했다. ‘영국 로열풍’이라고 불렸던, 큼직한 장미꽃 무늬가 들어간 최고급 원단이었다.

그런데 안 쓰던 기계를 처음 사용하다 보니 첫 생산분에 불량이 났다. 열 조절이 잘못돼 뻣뻣해져버린 것이다. 원피스 감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총 3억원어치로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이 원단을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했다.

1년쯤 창고에 넣어두다 혹시나 싶어 주로 재고 물건이 덤핑으로 팔리는 동대문 종합시장 점포에 내다놨다. 그런데 순식간에 동이 났다. 알고 보니 침장, 즉 이불보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전량을 사간 것이었다.

당시는 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은 이사를 계기로 침대를 마련하고 서양식 침장, 즉 침대보와 이불을 구입했다. 그 전까지의 이불 호청으로 흰 천만 사용됐던 것과 달리 다양한 색과 무늬의 나염 원단이 필요해진 것이다.

마침 우리가 실수로 만든 원단이 국산 침장 회사의 눈에 띄는 바람에 그쪽 판로가 뚫렸다. 이쪽 수요는 워낙 폭발적이어서 기존에 주력했던 양장용 원단의 10배가 넘었다. 자연히 이쪽으로 사업 방향을 틀게 됐다.

그 덕에 얼마 후 수입 자유화로 다른 회사가 고생할 때도 우리는 거의 영향이 없었다. 침장 원단은 가격경쟁력 문제로 외국 원단이 지금까지도 국산을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내 살 길을 미리 열어주신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게 맡길 일이 있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때쯤 이미 교회와 교계 사업들에 시간과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사업의 멘토였던 김교석 회장은 안타깝지만 1979년 부도 이후로 재기하지 못하고 해외에서 사시다 돌아오셔서 1980년대 중반 지병인 당뇨가 악화돼 세상을 떠나셨다. 60대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분이 운영하던 회사 ‘보창’은 이후에 내가 인수했다. 지금도 내가 사장 직함을 걸어 둔 회사가 보창이다. 몇 년 전 직원들에게 사업 파트를 나눠 물려주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돌아보면 새록새록 신기하다. 40년 가까이 사업하는 동안 매일 새로운 상품과 수요를 개발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영업을 위해 남에게 굽실거리거나 부정한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남에게 멸시당한 일도 없었고 단 한 번도 남과 주먹을 쥐고 싸워 본 일도 없었다. 반대 논리에 부닥친 일도 없었다. 물론 매일 출근하면 불량품이 나오고, 거래처가 문을 닫는 등 새로운 일이 터져 있었다. 그렇지만 살펴보면 늘 한쪽에 비상구가 뚫려 있었다.

이렇게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곰곰 생각할 때가 많다. 일찍이 하나님을 믿고 사역에 몸담으셨던 조상들 덕이 아닐까. 하나님 뜻대로 살면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그 복을 내가 받은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절망 끝까지 내몰렸던 어린 시절의 고난도 다 약속이 이뤄지는 과정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