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탄생 100주년… 굿모닝! 李箱] (하) 영원한 모던보이의 초상
입력 2010-01-15 20:39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 다시 날개를 달다
살아 생전 내내 폐결핵에 짓눌린 육신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알게 된 변동림(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 자매)과의 짧은 사랑도 끝나버렸지만 이상 문학의 정신세계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박태원과 김기림 등이 쓴 13편의 주옥같은 추도문을 낳았다.
“여보, 상(箱)-
당신이 가난과 병 속에서 끝끝내 죽고 말았다는 그 말이 정말이오? 부음을 받은 지 이미 사흘, 이제는 그것이 결코 물을 수 없는 사실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이 섧구료…이제 당신은 이미 없고 내 가슴에 빈 터전은 부질없이 넓어 이 글을 초(草)하면서도 붓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여러 차례요.”(박태원 ‘이상 애사’, 조선일보 1937. 4. 22)
“상(箱)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이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어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의 환경과 종족의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김기림 ‘고 이상의 추억’, 조광 1937. 6)
그러나 장례식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힌 이상을 찾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고개를 넘어 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므로 미아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속설대로 이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죽어서까지 쓸쓸했던 그의 유골은 한국전쟁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없어지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 변동림 역시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비목(碑木)에 묘주(墓主) 변동림을 기입했을 뿐 웬일인지 나는 그 후 한번도 성묘하지 않았다.”
아내 변동림은 남편과 사별한 지 7년만인 1944년 5월 1일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결혼식 주례는 화가 고희동, 사회는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이 섰다. 이상과의 결혼생활 4개월 동안 낮과 밤이 없이 즐긴 밀월을 월광(月光)으로 기억할 뿐이라는 변동림은 재혼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김향안으로 고쳤다.
한국전쟁과 4·19, 5·16 등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이상은 잠시 잊혀진 시인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날개’ ‘오감도’ 등 작품이 중등 교과서에 실리고 문단과 학계 등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은 다시 날개를 달았다. 해마다 100편이 넘는 이상 관련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그는 한국문학의 중심이 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과 김윤식이 각각 ‘이상론’과 ‘수심을 몰랐던 나비’를 내고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화가로서의 이상’, 수학자 김용운이 ‘이상 문학에 있어서의 수학’, 정신의학자 조두영이 ‘이상의 인간사와 정신 분석’,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이상 텍스트 연구’를 발표하는 등 분야별로 이상의 생애와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이 가운데 고은 시인이 펴낸 ‘이상 평전’(민음사, 1974)은 이상의 고독과 사랑, 삶과 문학, 꿈과 파멸 등을 전방위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고은은 이 책에서 이상을 “자신의 고민을 시대에 만화처럼 투여한 행복한 파산자”라고 규정한 뒤 “이상 문학은 이 땅의 현대문학에 대한 음습한 주부(呪符)이며 한국 모더니티의 흑사병”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수많은 꿈이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의 난해
그 난해의 현대였다.
원(圓)보다
각도의 기수였다.
도시의 자식아
도시의 자식아.”(고은 ‘만인보’ 중에서)
혹한이 맹위를 떨친 14일 서울 방이동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상 문학비를 찾았다. 1926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제17회 졸업생인 이상을 기리기 위해 보성고 동문들과 김향안 여사가 1990년 5월에 세운 문학비는 시인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추상조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오감도’를 새긴 시비가 따로 마련됐다.
혼자 일본으로 떠나 유골이 되어 돌아온 이상을 용서할 수 없었던 김향안 여사는 반세기의 무관심 끝에 2004년 숨지기 전 ‘오감도’에 대해 글을 남겼다. “이상의 문학은 쉬르의 영향은 받았지만, 그리고 막 태동한 실존의식이 움트기도 했지만 ‘오감도’는 쉬르도, 다다도 아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구라파에 유행한 개념의 예술-시는 보고 그림은 읽는-을 시도한 것이다.”(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2005)
사랑을 버리고 이상을 좇아 떠난 이도, 평생의 회한을 털고 화해의 손을 내민 이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만 지금,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열세 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오감도’가 유난히도 추운 겨울에 애달픈 추억을 많이 남긴 천재 시인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13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適當)하오.)
제(第)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第)1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人)의아해(兒孩)는무서운아해(兒孩)와무서워하는아해(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適當)하오.)
13인(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