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진홍] 拷問과 박종철
입력 2010-01-14 18:38
유네스코가 1979년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숨진 사람은 400여만명이다. 공동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과 고문실 등에서 숨을 거뒀다. 이곳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렵게 생존한 이들 가운데 90%가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으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고문의 악몽이 자꾸 되살아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했다는 얘기다. 의학적으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불린다.
원하는 정보를 얻거나 자백을 받기 위해 공권력이 개발한 고문 방법은 다양하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고문 추방운동으로 고문은 현저하게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 소신만 뚜렷하다면 고문을 이겨낼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문을 이겨낼 인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게 고문 피해자들의 전언이다. 인간성을 말살하고, 아무도 모르게 죽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하는 고문을 수차례 당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너지게 된다는 얘기다.
1985년 9월 4일부터 26일까지 23일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한 김근태 전 의원은 이렇게 회고한다. “반복되는 전기고문, 물고문, 집단폭행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들(고문 가해자들)은 나에게 알몸으로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조서를 써줬다.”
김 전 의원은 강인한 의지로 정신적 후유증을 극복했지만 예외적이다. 대부분 PTSD를 비롯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고문이 행해지는 시간은 짧을지라도 고문으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유엔이 고문방지협약을 만든 배경에도 고문 피해자들의 정신이 황폐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김 전 의원이 고문당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대학생이 1987년 물고문을 받던 중 숨진 사건이 있었다. 박종철군. “수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박군이 ‘억’하고 쓰러졌다”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다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어제가 그가 숨진 지 23주기 되는 날이다. 그의 죽음은 민주화를 앞당기고, 고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 인권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정부가 역대 정권에서 고문당한 피해자 실태를 파악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면 어떨까 싶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