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대신 붙여진 이름 ‘不’… 끝나지 않은 죽음 무연고 시신 안치소

입력 2010-01-14 18:16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습니다. 서울도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간 날이 많습니다. 그래도 낮에는 수은주가 올라가고, 며칠 추우면 며칠은 지낼 만해집니다. 곧 봄도 오겠지요. 그런데 이곳은 1년 내내 영하 4도입니다.

아무 연고없이 숨진 이들을 보관하는 시신 안치소 냉동칸이 바로 그곳입니다.

큰 병원 안치소에는 이런 냉동칸들이 있습니다.

고인(故人)이 보통 사흘간 머물러 장례를 마치고 떠나는 안치소에 몇 주씩, 몇 달씩 누워 있는 이들을 우리 법은 ‘무연고 시체’라고 부릅니다.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산아(死産兒)

지난해 7월 26일 경기도 안양의 한 여인숙에서 여자 사산아가 발견됐다. 열흘가량 방치된 상태였다. 경찰이 곧 산모를 붙잡았다. 32세 유흥업소 직원. 알코올 중독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검찰은 정상을 참작해 산모를 구속하지 않았다. 시신은 안양 A병원 안치소 냉동칸으로 옮겨졌다. 장사(葬事) 등에 관한 법률 제2조는 임신 4개월이 지나면 사산된 태아도 시신으로 분류한다. 병원은 불구속기소된 산모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찾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오지 않았다. 일간지에 시신 연고자 찾는 공고를 냈다.

시신은 6개월째 냉동칸에 있다. 이달 말까지 기다린 뒤 관할 구청에 무연고 시신 처리를 의뢰할 예정이다. 무연고 시신의 경우 관할 구는 공원묘지에 가매장한 뒤 10년간 연고자를 기다렸다가 다른 무연고 시신들과 합사(合祀)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는 “죽어서 태어난 아기를 생명이라고 할 수나 있을지…. 정말 짧은 삶인데 가는 길도 편치 못하네”라고 했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살았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땅 속에서 엄마를 기다리게 됐다.

병원 인근에 높은 산이 있다. 추락사나 자살 사건이 많을 때는 월 10건 이상 발생한다. 그 시신은 대부분 이 병원에 온다. 산에는 어둠이 빨리 찾아든다. 그늘이 지면 지문이 오그라든다. 장례식장 관계자는 “산에서 오는 시신은 신원 확인에 보통 몇 개월씩 걸린다”고 했다.

여중생

서울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4.6도였던 지난달 5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대교 교각 부근에서 이은혜(가명·15)양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인근 B병원으로 옮겨졌다. 자살로 추정됐다. 시신에는 신원을 확인할 단서가 없었다. 미성년자는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전이라 지문 대조도 어렵다. 이런 경우 탐문수사 결과나 실종신고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지난 5일 이 병원 장례식장. 각 분향실의 고인 이름을 빼곡히 적어놓은 게시판을 보니 맨 아래 ‘기타’란 구석에 이양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이양 어머니가 이곳을 찾아왔다. 시신이 안치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이다. 부모는 이혼해 각각 재혼한 상태였다. 중학생이던 이양은 방황하다 우울증세를 보인 뒤 가출했다고 한다.

이 안치소는 시신 14구를 수용할 수 있다. 이날은 이양을 포함해 무연고 시신 2구가 있었다. 여름엔 무연고 시신이 3분의 1을 차지한다. 대부분 인근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진 사람들이다. “그래도 겨울이라 뜸한 편이죠. 올해는 특히 추워서….” 장례식장 관계자가 말했다.

병원 측은 “강물에 오래 잠겨 있어 지문이 훼손되면 신원 확인에 석 달은 걸린다”고 했다. 이 병원은 이렇게 오래 안치된 시신의 연고자가 나타나면 300만원 안팎의 장례비용을 100만원 이하로 깎아주고 있다. 어렵게 가신 분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아버지

9불1232. 지난해 10월 12일 서울 을지로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된 박현승(가명·49)씨에게 두 달간 붙여진 이름이었다. 국립의료원 안치소에서 무연고 시신에 붙이는 등록번호다.‘9’는 2009년을, ‘불(不)’은 신원불상자를 뜻한다.

경찰이 연고자 수배에 나서서 1주일여 만에 전처 심모씨를 찾았다. 여러 해 전 이혼해 중학생과 초등생 두 아들을 심씨가 키우고 있었다.

심씨는 박씨 시신을 수습해 장례 치르기를 거부했다. 병원 관계자는 “심씨가 결혼 생활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 측은 박씨를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키로 했다. 이 경우 연고자가 ‘시신포기각서’를 병원에 제출해야 한다.

심씨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두 아들도 포기 각서를 써야 하는 게 문제였다. 심씨는 “아버지가 죽었고 그 시신을 포기한다는 걸 어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며 완강히 거절했다. 관할 지방자치단체는 “나중에 아이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니 각서를 받아야 한다”고 재촉했다.

병원 측은 이틀간 심씨를 설득해 가까스로 자녀들의 각서까지 받았다. 이후 행정 절차를 거쳐 시신 발견 두 달 만인 지난달 9일 비로소 박씨는 서울시립 화장장 승화원(경기도 고양시)의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될 수 있었다.

노숙인

지난해 10월 25일. 노숙인 이모(44)씨가 국립의료원 응급실에 실려와 숨졌다. 닷새 뒤 형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병원 고객지원팀 사무실에 들어서는 그에게서 악취가 풍겼다. 술 냄새도 났다.

숨진 동생은 노숙인 쉼터에 등록돼 있었다. 주소란에 적혀 있는 전남 시골 마을의 어머니는 노환으로 거동하지 못했다. 어머니 연락을 받고 찾아온 형도 노숙인이었다. 동생을 본 지 10년도 넘었다고 했다. 동생은 결혼도 안 했다. 형은 장례비가 없었다. 병원을 찾은 지 1시간 만에 형은 시신포기각서를 썼다. 안치소에 온 지 한 달 보름, 이씨는 승화원으로 향했다.

지난해 국립의료원에 온 무연고 사망자는 모두 59명. 그 중 36명만 유족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나머지 23명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유족이 시신을 포기해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됐다.

병원 관계자는 “무연고 시신을 처리하는 날이면 장례식장과 화장장 한쪽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 형편이 어려워 시신을 포기한 이들이다. 그는 “유족이 시신을 포기하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마지막 가는 길을 볼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무연고 시신 2008년 1560구

시신의 연고자가 없으면 먼저 경찰이 배우자, 직계 혈족, 직계 존·비속 등을 찾아 나선다. 경찰도 찾지 못하면 종합일간지에 3개월간 2차례 공고한다. 이후에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연고자가 나타나도 시신을 포기하면 무연고 시신이 된다. 장사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은 얼마 동안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아야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하는지 정해두지 않고 있다. 다만 장례식장 운영 손실을 감안해 대개 1년을 넘기지 않는 범위에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한다.

장사법 시행령은 무연고 시신을 매장 또는 화장해 10년간 보관토록 하고 있다. 10년이 지나도 연고자가 없으면 다른 무연고 시신과 합사된다. 합사 방식은 지방자치단체마다 조금씩 다르다. 커다란 항아리에 여러 시신의 뼛가루를 함께 담아 두기도 한다. 2008년 전국의 무연고 시신은 모두 1560구였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원하영 대학생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