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보, 이제 民이 주도… 휴대전화가 뚫었다

입력 2010-01-14 18:07


북한 주민은 지금… 남쪽과 통화중

지난 7일 서울 봉천동 열린북한통신 사무실. 방 2칸짜리 허름한 이곳에서 30∼40대 기자 7명이 분주하게 기사를 쓰고 있었다. 정보를 확인하는 전화통화 소리도 이어졌다. 이 가운데 3명은 탈북자 출신. 또 다른 탈북자 기자 1명은 전날 중국 출장을 갔다. 이들은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단둥 등 중국 지역 출장이 잦다. 실시간 북한 뉴스를 보도하기 위해 중국 쪽 통신원들을 관리하고, 국경을 오가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하태경 대표는 외국 언론 인터뷰에 응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가 사무실로 찾아왔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등은 전화를 걸어왔다. 인터뷰 도중 통일부 당국자의 전화도 받았다. 하 대표는 결국 저녁 약속을 취소해야만 했다.

이날 오후 4시17분 열린북한통신은 “8일 김정은 탄생을 기념하여 7일 오후 5시 평양에서 중앙보고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김정은 후계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 보도가 나간 직후 국내외에서 확인 전화가 쇄도한 것이다.

지난해 2월 창간된 북한 전문 민간매체 열린북한통신은 지난 1년간 600여건의 북한 소식을 내보냈다. 여기서 보도한 김정일 뇌졸중, 김정은 후계설, 개성공단 임금 4배 인상 요구, 7·7 디도스 공격 북한 배후설 등은 국내외 언론이 일제히 인용 보도했다.

북한 뉴스의 패러다임 변화

화폐개혁, 신종 인플루엔자 발생, 김정은 생일 국가기념일 지정. 최근 2개월 사이 터져나온 굵직굵직한 북한 관련 뉴스들이다. 공통점은 소규모 북한 전문 매체들이 처음 보도했다는 점이다.

세계적 특종이 된 북한 화폐개혁 소식은 지난해 11월 30일 오후 4시7분 NK지식인연대가 처음 보도했다. 한 시간 후 데일리NK도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11월 30일 오후 2시부터 화폐교환을 실시했다고 전해왔다”고 보도했다. 통일부는 이 소식이 나온 다음날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남한의 국가정보원이나 통일부, 북한의 공식 보도 등에 의존했던 북한 뉴스 시대가 바뀌고 있다. 탈북자 기자들을 고용하고 국내 탈북자 네트워크와 북한 내부 소식통을 확보한 북한 전문 매체들이 북한 뉴스의 새로운 공급처로 부상했다. 하 대표는 “북한 뉴스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며 “북한 뉴스를 민간이 주도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달 북한에서 공식 인정한 신종 플루 발생 소식은 북한인권단체 ‘좋은벗들’이 한 달 전부터 소식지를 통해 보도해온 내용이다. 좋은벗들은 1주일에 한 번씩 내던 소식지를 최근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내고 있다. 북한 뉴스가 그만큼 폭주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10여개 매체가 대북 언론정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며 “민간 차원의 대북정보 수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철의 장벽’이라는 북한 내부 소식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데일리NK, 좋은벗들, 열린북한통신, NK지식인연대, 자유북한방송, 자유아시아방송(RFA) 등이 대표적 매체다. 탈북자 중심의 북한 연구소인 북한전략센터도 올해 북한 관련 인터넷 매체를 선보일 계획이다.

실시간 북한 뉴스

북한 전문 매체들이 보도하는 소식들을 보면 ‘북한 내부 소식통’ 혹은 ‘통신원’을 출처로 내세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이 인용하는 내부 소식통이나 통신원은 북한 주민, 재중 탈북자, 조선족, 국경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나 북한인권단체 활동가,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무역상 등이다.

손광주 데일리NK 편집인은 “서울에서 북한(중국 접경 지역)으로 전화가 된다”며 “여기 사무실에 앉아 북한 사람들과 직접 통화하며 기사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실시간 북한 뉴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북한 화폐개혁 보도의 경우 남한에 있는 탈북자가 북한의 가족과 통화하던 중 들은 얘기를 기사화했다고 한다. 손 편집인은 “두만강 너머 회령과 청진, 압록강 너머 신의주, 평양 근처 평성 등 네 곳을 크로스 체크해 화폐개혁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아직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오후 5시 김정은 탄생 기념 중앙보고대회’는 한 시간 전 보도됐다. 하 대표는 “오후 2시30분쯤 북한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다 ‘5시 기념행사에 오라고 해서 지금 준비하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오후 4시쯤에는 중국에 출장 나온 북한 무역회사 직원과 통화가 돼서 ‘사무실에서 5시에 기념행사가 있다’는 말을 확보했다”고 보도 경위를 밝혔다.

북한 내부 소식통을 확보한 배경에는 남한 내 탈북자 증가와 북한 내 휴대전화 보급이 있다. 김광인 북한전략센터 박사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적게는 10만명, 많게는 20만명이 북한을 떠났고, 그 가운데 2만명가량이 한국에 있다”며 “탈북자 상당수가 어떤 방법으로든 북한 내 가족, 친지, 친구들과 연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 편집인은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의 최고 관심이 무엇이겠느냐. 북한에 남은 가족들 먹여 살리고, 그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 아니겠느냐”며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들여보낸 휴대전화로 북한 내부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가나 행사, 사건 사고 등 북한 주민들이 아는 정도의 소식이라면 곧바로 남한에 알려지는 게 현실이다. 북한 내부 소식통도 국경 지역에서 평양 쪽으로, 일반 주민에서 고위급 간부로 점차 확대되고 있다. 하 대표는 “북한이 개성공단 임금 4배 인상을 요구했다는 보도를 했는데, 그 소식을 전해준 게 평양과 통하는 고위급 인사였다”며 “엘리트 출신 탈북자들을 통해 군이나 당, 내각 등과 관련된 정보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휴대전화가 불러온 정보혁명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에 휴대전화가 들어가기 시작한 지는 벌써 10년쯤 됐다. 계기는 1990년대 식량난에서 촉발된 대규모 아사와 탈북 사태. 김 박사는 “북한 주민들은 대아사로 웬만한 전쟁 이상의 극한 상황을 경험했다”며 “이때부터 각자 생존을 위한 길을 찾게 됐고, 바깥 정보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휴대전화는 북한 주민들에게 생존수단이 되고 있다. 탈북자들은 중국 휴대전화를 사서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북한 내 가족이나 친지에게 전달한 뒤 안부를 묻고 돈을 보낸다. 휴대전화를 걸어 언제 누가 돈 얼마를 들고 어디로 가니 와서 받으라는 식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손 편집인은 “탈북자 송금이 북한 장마당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남한과의 통화는 주로 북한 내 중국 접경 지역에서 이뤄진다. 이곳에서 중국 휴대전화를 사용하면 중국이 세워놓은 기지국을 통해 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탈북자 80∼90%가 함경북도 등 국경 지역 출신이라 이들과 연결된 북한 주민들도 대부분 국경 지역에 몰려 산다.

하 대표는 “국경 지역 북한 마을에서 수만명이 휴대전화를 쓰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국경 지역 주민들에게 애니콜이 최고 인기”라며 “그 정도로 국경 지역에서는 휴대전화가 보편화돼 있고 구하기도 쉽다”고 했다.

북한에서 국제전화가 되는 휴대전화는 전부 불법이다. 휴대전화 이용자들에 대한 북한 정부의 추적도 강화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사전에 약속된 시간에만 전화기를 켜서 통화한다.

북한으로부터의 통신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남한에 북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대학 내 북한 강좌마다 수백명씩 학생이 몰렸고, 언론사들은 앞 다퉈 ‘북한부’를 개설했다. 지난해 터진 김정일 위원장 건강이상설과 김정은 후계설은 북한 뉴스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손 편집인은 “김정일 건강과 후계 구도는 국제적 관심사”라며 “북한 체제 변화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 내부 소식에 대한 수요는 어느 때보다 크다”고 말했다. 이찬호 통일부 정세분석총괄과장도 “북한 정보 시장이 새로 열리고 있다. 미국 등 외국에서도 민간 대북 정보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1970∼80년대 독재정부 시절, 일본 도쿄여자대학 교수로 있던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는 일본에서 한국 소식들을 모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썼다. 2010년 남한에서는 탈북자들이 북한 소식들을 휴대전화로 듣고 ‘북한으로부터의 통신’을 쓰고 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