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사고’ 2년만에 또 기름 유출… 당진군민 분통 터진 까닭
입력 2010-01-14 18:13
“대산항은 시한폭탄… 또 터질줄 알았어”
“석유 찾는다고 외국은 왜 가느냔 말이야. 여기 돌만 뒤집으면 석유가 나오는데. 남의 땅은 뭐 하러 파냐고 여기가 다 석유 천지인데….”
지난 8일 오후 4시 충남 서산시 대산읍 대산항 대산석유화학단지 내 현대오일뱅크 부두 선착장. 마을 주민 최태선(43)씨가 부두 석축의 돌을 들어내다 고함을 질렀다. 손에 든 돌덩이는 기름범벅이었다. 약 3주 전 유조선에 싣다가 유출된 벙커C유다. 방제작업을 마쳤다는데, 둘러보니 바위틈새마다 혹한에 굳은 기름이 꺼멓게 들러붙어 있었다.
지난달 20일 성호해운 소속 유조선 신양호(4026t급)에서 벙커C유가 담당자 실수로 대산항 앞바다에 유출됐다. 흘린 기름은 5.9㎘. 2007년 12월 충남 태안 허베이스피리트호 사고(1만2547㎘)와 비교하면 2000분의 1 규모에 불과하다.
하지만 6㎘도 안 되는 기름은 수십만개의 타르 조각으로 부서져 대난지도, 소난지도, 비경도, 대조도 등 인근 당진군 석문면의 섬 8곳을 습격했다. 섬들이 대산항을 병풍처럼 막아선 지형적 특성 때문이다. 현장실사를 나온 수협중앙회 관계자는 “와류가 생기는 좁은 해역에 기름을 들이부은 꼴”이라며 혀를 찼다.
기름유출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제철 맞은 서해안 굴 주문은 뚝 끊겼다. 인터넷에는 우스개가 떠다녔다. ‘서해 바다를 파면 석유 나오겠다’ ‘서해안은 좋겠다. 수돗물 넣으면 자동차가 움직일 거다’ ‘한국석유공사는 서해바다를 시추하라’…. 생업을 접은 섬사람들은 걸레를 들고 바닷가에 모였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조금만 일찍 알렸어도 상황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가슴을 쳤다. “시한폭탄을 안고 산다. 언젠가 또 터질 줄 알았다”고도 했다.
37㎞ 떨어진 태안군 만리포 앞바다에서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난 지 고작 2년. 서해안은 왜 다시 기름바다가 된 것일까. 대산항 기름유출 사고는 태안 사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주민들은 무엇을, 왜 시한폭탄이라 부르는가.
서산에서 무슨 일이
지난달 22일 오전 대조도에 거주하는 난지2리 이장 이종호(55)씨는 주민들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마을 해변에 시꺼먼 타르 덩어리가 밀려든다고 했다.
기름유출은 이틀 전인 20일 밤 10시40분에 벌어졌다. 유조선 신양호 담당자가 기름 탱크의 밸브를 잠그지 않아 현대오일뱅크 저장시설에서 배에 싣던 벙커C유가 환기구를 통해 갑판과 바다로 넘쳤다.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현대오일뱅크 측이 사고를 확인하고 태안해양경찰서에 신고한 게 10시간35분 후인 21일 오전 9시15분이었다.
이때부터 해경과 해양환경관리공단, 현대오일뱅크 측은 기름 제거에 돌입했지만 피해 당사자가 될 당진 섬마을에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이틀이나 지나 바닷물에 뜬 타르를 보고 사고 사실을 확인했다.
21일 해경 방제선이 뜨면서 대산항에서 기름사고가 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는 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확인에 나섰을 때만 해도 현대오일뱅크 측은 육상에서 송유관이 터졌고 기름이 일부 흘러 수습하고 있다고 답했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유출량은 0.8㎘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오일뱅크 측은 “그런 해명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난지도유류피해대책위원장 최장량(40·소난지도 거주)씨는 “육상사고인데다 양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듣고 별 일 아닌 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경 수사 결과, 확인된 유출량은 이보다 7배 이상 많은 5.9㎘다. 주민들이 분노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기름유출을 인지한 21일 오전에라도 정확한 사고 규모를 알렸더라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난지도 주민 오형운(57)씨는 “어민들이 가진 5t 미만 소형어선이라도 동원해 바다 위에서 기름띠를 에워쌌으면 기름이 섬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라며 분개했다. 게다가 이번에 유출된 기름은 점성이 높아 쉽게 굳는 벙커C유여서 제거작업은 훨씬 더뎠다. 태안 사태 때는 원유였다.
지난 8일 대난지도 해안에서 방제작업을 하던 주민 이우란(69)씨는 “날이 추워 굳은 기름이 녹아 바다로 모이면 양식장은 쓰레기장이 된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사람들
이번 사고는 대산단지 내 대산항에서 일어났다. 대산항은 행정구역상 서산시에 속한다. 하지만 기름유출 피해는 고스란히 당진의 섬마을이 감당해야 했다.
대산항에서 대난지도까지는 2㎞ 안팎. 소형어선으로 툴툴 가도 10분이면 닿는다. 가장 가까운 비경도까지는 100m가 채 안 된다. 그나마 섬은 먼 편이다. 대산항에서 배로 몇 십m만 나가면 바로 당진 바다가 시작된다. 섬 주민 생계 터전인 바지락 전복 가리비 양식장 220여㏊가 바로 그 부근에 있다.
대산단지가 조성되면서 대산항은 섬 주민의 밥줄 바다를 침범했다. 서산시는 대산단지 조성을 위해 바다를 일부 매립했다. 바다가 좁아지니 항구 시설도 당진 쪽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당진군 최대 관광지 중 하나인 대난지도 난지해수욕장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에 대산항 정박장(항구에 들어갈 배가 대기하는 일종의 선박 주차장)이 지정됐다. 이곳에는 입항을 기다리는 대형 선박 네댓 척이 사시사철 떠 있다. 당진 바다가 대산단지 앞마당처럼 사용되는 셈이다.
게다가 대산항이 처리하는 연간 화물 4300만t 중 90% 이상은 유류다. 현대오일뱅크, 삼성석유화학, LG화학 등 석유화학 관련 대기업이 입주한 대산단지 때문이다. 기름 수만t을 실은 대형 유조선이 하루에도 수십 척씩 대산항을 향해 서해 바다를 오간다는 얘기다. 태안사고 때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의 목적지는 대산단지 현대오일뱅크 저장시설이었고, 이번 사고 역시 대산단지에서 벙커C유를 싣다가 발생했다.
같은 일은 언제든 또 벌어질 수 있었다. 이번 사고가 그렇듯, 대산항 인근에서 사고가 나면 피해는 당진 섬주민 몫이다. 주민들이 말하는 ‘시한폭탄’이란 바로 대산항과 그곳을 오가는 유조선이었다.
위험은 상존하지만 당진 주민에게 딱히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산단지 입주 기업은 세금도 서산시에, 발전기금도 서산 마을에 내놓는다. 당진군이 얻는 고용효과도 미미했다. 단지가 속한 서산 시민에게 고용 우선권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당진군청 관계자는 “군의 관리감독을 받는 게 아니어서 군청과 단지 기업 사이에는 그간 대화채널이 없었다”고 했다.
당진 섬주민은 잃는 건 많고 얻는 건 없는 상황에 진력이 났다. 대난지도 주민 방진현(41)씨는 “안개 낀 날이나 저기압일 때는 공단에서 불어오는 석유와 LPG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섬주민들은 다 두통약을 달고 산다”고 하소연했다.
소난지도의 한 주민도 “이건 현대 냄새, 이건 삼성 냄새하면서 매연을 구분할 지경이 됐다”며 “코앞 공장 때문에 매연과 폐수, 사고 위험까지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입는데 단지에 잡역부로라도 취직됐다는 당진 사람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불평했다.
사고 후 쌀 540여 포대를 들고 당진 섬마을을 찾은 것은 현대오일뱅크가 아니라 당진화력발전소(당진군 석문면)를 운영하는 한국동서발전이었다. 만약 서산시 피해가 컸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기름때 묻은 돌덩이를 닦으며 당진 주민들은 반문하고 있다.
서산·당진=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